"조도사"란 별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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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작년 여름 어느 일요일.
모처럼 딸네 집에 오신 친정 어머니와 남편과 이 얘기 저 얘기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복도 끝에 있는 부엌창문 앞에서『조 도사』하고 나를 부르는 옆집 엄마의 목소리에 어머니께서 깜짝 놀라시며『아니 이게 무슨 소리냐, 도사라니.』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빙그레 웃으며 민망한 자세로 앉아있던 나룰 가리키면서『저 사람이 도사랍니다』했다.
그 날 도사로 바뀐 딸의 호칭에 무척 당황해 하시던 친정 어머니를 생각하면 쓴 날 오이를 씹었던 기억처럼 입맛이 써온다.
지금쯤 우리 나이에 이르른 대부분의 여자들은 아이의 이름 밑에 엄마자를 덧붙여 누구의 엄마로 자연스레 불려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누구의 엄마에서 어느 날『도사』로 변신한 것이다. 그것은 도술과 마법을 써서 주위사람들을 감탄시킬 수 있는 초인적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생겨진 이름이 아니라 주변의 몇몇 엄마들이 남편의 월급을 건네 받던 날 푸념 끝에, 각자 자신들의 모습에 과감히 훈장처럼 달아놓은 이름인 것이다.
쉬지 않고 치솟는 물가 속에서 생활비의 절반쯤을 일주일만에 지출해 버리고도 나머지로 한 달을 용케도 버텨나가는 끈기와 인내, 현명한 지혜를 찾아 우둔한 실수를 잊을 때쯤 다시 되풀이하여 시장을 서너 바퀴 돌아본 후에야 겨우 한 두 가지 찬거리를 사들고 돌아서는 아내들의 처지를 두둔해서 만들어낸 우리들의 이름인 것이다.
그런데, 나한데 붙여진『조도사』란 대명사를 남편은 기발한 재치로 하여 그렇게 불려지는 줄 알고 내심 흐뭇한 미소를 띠었을 것이다. 이렇듯 안팎의 뜻이 다른 도사라는 이질적인 호칭도 점차적으로 내 이름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며칠전 이웃끼리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함께 어울려 도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하여나도 장마가 오기 전에 부지런히 그 축에 끼어 도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혼 초창기 수 없이 이사를 한 터에 장롱이 거의 다 망가져 버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그 장롱을 운신할 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엉거주춤 미련한 생활의 고집스런 오기를 부리니 또 그 나름대로 이번에도 어렵지만 탈없이 지나가게 되었다. 힘든 생활에 이젠 능숙하게 단련된 내 보습이 남편의 눈에도 도사로 비쳐졌을까?
그러나 그날 망가진 장롱과 어찌나 힘겨운 씨름을 했던지 며칠동안 허리를 펴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하고 다녔다. 이런 나를 옆에서 보고 섰던 아홉 살 난 아이녀석이『엄마도 이젠「망구」가 됐나봐』한다.
이상과 현실이 부딪치는 생활 속에서 생전 늙지 않고 젊게만 있을 줄 알았던 내 모순된 착각의 얼굴처럼 나의 이름도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여러 번 바뀔 것이고 보니 내년쯤 남편은 과연 어떤 새로운 이름으로 아내를 정답게 불러줄는지 모르겠다.
(서울 강남구 반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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