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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7)제73화 증권시장(6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증권계서 물러나>
5윌 증권파동의 후유증으로 침체에 빠진 증권시장을 활성화하는 길은 주가가 오르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주력주인 대증주와 종금주의 가격이 올라가야 한다.
대증주는 구주 12억주와 신주 28억주가 상장되어 있었는데 신주는 액면가의 28배인 14환의 프리미엄이 붙어 14환50전이 불입됐다. 통화개혁으로 1환45전을 불입한 셈이나 당시 가격은 50전선에서 움직였다.
나는 당시 줏가를 5배 정도는 올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승상배·강성진·최진수씨 등의 공동보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나의 작전에 적지않은 차질을 빚었다.
승 사장과 최 사장은 나의 생각대로 매수주문을 해나갔으나 강 사장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10월말쯤으로 기억된다.
영화증권의 강성진 사장과 시장 대리인 김모 씨가 다른 증권회사에 매도건옥을 많이 세워놓고 주가를 내리치려고 한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증권시장에서 정보의 중요성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정보입수에 혈안이 되고있는 것이다. 나 또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
오후의 마지막 장이 열리기 직전에 거래소 2층 시장으로 울라갔다.
오래간만에 거래소의 시장에 들어간 나는 강성진 사장과 김시장 대리인 두 사람을 불러 작전지시를 했다.
대증주의 신주가격이 34전까지는 사고 35전이되면 무제한으로 팔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시장 안에서 매매거래를 지켜봤다.
시장 안은 긴장감이 감돈 채 대증주의 매매는 끝났다.
오전시세가 26∼27전이었기 때문에 35전이라면 7∼8전 오른 값이다.
처음으로 시장에 나가 매매에 대한 지시를 직접 했다. 나도 상당히 흥분했던 것 같았다.
장이 끝난 뒤 매매수량을 확인해봤다.
범일증권과 홍익증권 두 회사의 매수량은 약 6억주였고 영화증권의 매도수량은 16억주에 달했다. 결국 10억주의 매월을 한 셈이었다. 가격은 8전이 상승했다.
나는 내 계획대로 된 것에 흡족해 하면서 영화증권 회장실로 돌아오니 J씨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와 있었다.
여러번 은밀한 얘기를 들려주더니 잠시 증권계에서 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나는 물러나도 좋다고 했다. 그러고 있는데 강 사장이 들어왔다.
그때서야 승 사장과 최 사장이 여러 차례 강 사장에 대해 말해온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됐다.
J씨를 나에게 소개시켜준 K씨마저 나의 증권계 일선에서의 퇴진을 권유하므로 나는 보따리를 쌌다.
다음 날부터는 영화증권에 출근하는 것을 그만두고 남산동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일흥증권 상임고문 이창규씨를 중심으로 증권거래소 P이사와 강 사장 등이 나의 퇴진공작을 벌였던 것이다.
승상배씨나 최진수씨가 제의했던 대증주 매수작전을 제2의 증권파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며 반대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강 사장 등은 내가 줏가를 올리면 많은 손해를 보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위책이었다.
나는 강성진 사장에게 모든 일을 말기고 집에서 쉬게 됐다.
11월초 내가 후퇴하던 날 대증주의 신주는 42전까지 급등했다.
내가 일선에서 물러난 것을 아는 사람은 7∼8명에 불과했다.
비록 집에서 쉬고 있었으나 증시의 동태는 눈 여겨봤다.
42전까지 상승했던 대증주(신주)는 3∼4일 후 폭락하기 시작했다.
보름도 되기 건에 10전 선까지 폭락했다. 증시가 또 문을 닫게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
내가 후퇴한지 20일쯤 되는 날 강성원 씨가 찾아와서 장태화씨를 좀 만나 달라고 했다.
증권계에서 후퇴한 사람이 무슨 할 일이 있겠느냐 면서 같이 대한극장 앞의 약속장소로 갔다.
장씨는 5월 증권파동 후 나의 외유를 권했던 분이다.
어떻게 하면 증시를 정상화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를 퇴진시키기 위해 들려준 J씨의 이러저러한 얘기가 거짓말임을 알았다.
그러면서 다시 증시에 나가줄 것을 요청했다.
가족들은 증권에 다시 관여하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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