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의 나는 이렇게 읽었다] 이 풍진 세상의 莊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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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을 만나서 그런지 지난 연말부터 ‘수 틀리는’ 일들이 부쩍 잦았다. 장창 꼬나들고 풍차로 달려드는 400년 전의 짓거리를 다시 써먹기도 뭐하고, 그러니 스스로 화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어름에 지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노자의 상선여수(上善如水) 훈도가 다가왔다.

그래 물처럼 살자! 이 판에 누가 책을 한 권 보냈는데, 아 글쎄 거기 “물 흐르듯 산다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그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139쪽)라고 했더라니까. 토머스 머튼의 『장자의 도』(은행나무, 2004)가 그 책이다.

장자 독법은 여럿이다. 1960년대의 김동성은 “이와주자(以瓦注者)는 교(巧)하고 이구주자(以鉤注者) 탄(憚)하며 이황금주자(以黃金注者)는 혼( )하다. 기교일야(其巧一也)이나 이유소금(而有所衿)이면 즉중외야(則重外也)라. 범외중자(凡外重者)는 내졸(內拙)이라” 식으로 유장하게 읽었다. 이를 김달진은 “기와 쪽을 걸고 내기 활을 쏘면 용하게 맞고, 허리띠 장식이라면 마음에 걸려 조금 덜 맞고, 황금을 걸면 마음이 어지러워 맞지 않는다. 그 기술은 다 같지만 마음에 아끼는 것이 있으면 바깥을 중하게 여기게 된다. 밖을 중히 여기면 대개 속은 보잘것없는 법이다”라고 단아하게 풀었다.

그리고 머튼 식이 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활을 쏘면/ 재능을 한껏 발휘하지만/ 놋쇠고리를 바라고 쏘면/ 이미 긴장한다/ 금상을 걸고 활을 쏘면/ 눈이 흐려져/ 과녁이 두 개로 보이니/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그의 기교는 변함이 없지만/ 상이 그의 마음을 갈라놓는다”(163쪽). 그러니까 이 책은 동양 사상에 심취한 영국인 사제가 장자에 나오는 숱한 해학·우화·경구 가운데 그 정수를 가려내 62편의 시로 번안한 ‘시편’이다. 그는 무엇에 취해 장자를 영어로 옮겼고, 벽안의 독자들은 또 무엇에 반해 지난 40년 동안 25쇄나 찍어가며 이 책을 읽는 것일까?

역자 권택영 박사는 영문학 전공의 여교수다. 장자-영문학-여교수의 조합에 따르는 행여 어떤 삐뚜름한(?) 선입관일랑 붙들어매시라. 각 편에 역자의 단상이 딸렸는데 이것이 심상찮다. 예컨대 “왕십리역에서 국철을 갈아타지 않으려고 슬피 울 까닭도 없고, 왕십리역에 미처 다다르지 않았는데 먼저 내려서도 안 될 것입니다”(64쪽)라는 삶의 관조라든지, “만가(輓歌)도 시도 없고, 슬픔조차도 없이 그저 하얀 돈 봉투만 있습니다. 그리고 이유 없이 목을 잘린 수많은 국화송이들이 슬픔을 대신합니다”(58쪽)라는 장례식 소묘는 그야말로 장자의 경지 아닌가. 게다가 “텔레비전의 9시 뉴스는 스포츠 뉴스나 다름없습니다. 온갖 분쟁을 보여주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31쪽)라니. 어허, 이 책은 탄핵 소추와 촛불 시위 전에 나왔으니 그냥 넘어가자고.

누구나 한번쯤 들었으리라. 장자가 냇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의 기쁨을 안다고 하자, 혜자는 네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고, 장자는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으니 이는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너도 안다는 뜻이 아니냐고 대꾸하는 그 유명한 얘기를. 이 논쟁에서 머튼은 물론 장자 편이다.

그러나 역자는 “장자는 기표(記表)와 기의(記意)의 틈새가 무한히 열려 있음을 아는 포스트모더니스트요, 혜자는 하나의 기표가 하나의 기의만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리얼리스트이다”(148쪽)라고 풀이함으로써 기원전 4세기의 장자한테서 포스트모던 징후를 읽어낸다. 그러니 이 책은 장자와 저자와 역자의 공저(!)라고 해야 옳으리라.

고백컨대 나는 이 책의 ‘부실 독자’다. 먼저 “장자의 시는 하루에 아무리 많아도 두 편 이상 읽지 못합니다”(35쪽)라는 역자의 경고를 이 글을 쓰느라 어겼고, 또 “나는 그저 스스로 평화롭기 위해 장자를 읽고”(9쪽)라는 역자의 평화가 대체 내게는 언제 오느냐고 계속 보채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장자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나라는 어쩌고 경제는 어쩐다지? 김갑수 교수는 『장자와 문명』(논형, 2004) 서문에서 장자 독서에서 무위의 자연 못지않게 유위의 문명에 주목하라면서, 장자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현실을―이 풍진 세상을―고민한 실천적 지식인이라고 해석했다. 그렇다면 마음놓고 책을 읽자!

*** 정운영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했으며, 벨기에 루뱅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기대 교수이며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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