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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순간순간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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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32면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더불어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에서 자랐고, 젊은 시절 잠시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24세 때 『유년시절』을 발표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전쟁과 평화』 『참회록』 등 평생 90권의 저작을 남겼다.

톨스토이는 나이 쉰을 경계로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뉜다. 쉰 살 이전의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라면 쉰 살 이후의 톨스토이는 위대한 교사다. 부유한 백작 가문 출신으로 자신보다 열여섯 살이나 어린 예쁜 신부를 얻어 자기 소유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하며 살던 사람이 갑자기 변했다. 죽을 때까지 인간의 운명과 인류의 고통을 생각하며 오직 양심에 따라서만 산 것이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66ㆍ끝>『안나 카레니나』와 레프 톨스토이

아무리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지만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처럼 “거대한 허무”를 본 것일까. 그러니까 인간 내면의 저 어두운 밑바닥을 들여다보고 죽음을 의식하게 된 것일까. 그가 우리 나이 오십에 완성한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를 읽으면 그 즈음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작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저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이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그 불행한 모양이 저마다 다르다.” 소설은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의 외도로 인해 엉망이 된 집안 이야기로 시작된다. 불행한 가정이다. 그리고 오빠와 올케언니 돌리를 화해시키기 위해 안나가 도착한다. 성실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들, 매혹적인 외모까지 갖춘 안나는 아주 행복하게 보인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안나는 불륜을 저지르고 괴로워하다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안나를 사랑했던 매력적인 청년 장교 브론스키도 죄책감에 시달리다 죽음을 향해 전쟁터로 떠난다. 반면 바람둥이 남편으로 인해 고민하던 돌리, 안나에게 사랑하는 연인을 빼앗겼던 키티, 브론스키로 인해 실연의 아픔을 겪었던 레빈은 이따금 고만고만한 행복을 발견한다.

행복에 대한 톨스토이의 생각은 『안나 카레니나』 곳곳에서 드러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레빈이 풀베기하는 장면을 보자. 레빈은 ‘지주 나리’지만 농부들과 호흡을 맞춰 온몸에 땀을 적신다. 그는 심지어 풀을 베면서 무아지경에 빠져들 정도다.

“그럴 때는 손이 낫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낫 자체가 생명으로 가득 찬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술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일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데도 일이 저절로 정확하고 정교하게 되어가는 것이었다. 그런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처럼 행복이란 그저 순간순간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것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행복하길 원하지만 행복은 인생의 목표도 아니고 목적지도 될 수 없다. 돈도 명성도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도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완벽을 바랄수록 오히려 만족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대저택에서 마음껏 사치를 부리며 자신만을 사랑하는 젊은 애인과의 로맨스를 즐기는 안나, 그녀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나 이혼 문제는 둘째치고 몸이 불까봐 임신도 하지 못한다. 애인의 사랑이 식은 것 같아 밤에는 모르핀이 없으면 잠을 이룰 수 없다. 반면 키티와 돌리는 안나에 비해 모든 면에서 부족하지만 행복을 느낀다. 키티는 자기 젖이 띵띵 붓자 아기가 배고플 것임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마음씨 착한 남편을 생각하며 아이에게 말한다. “그래, 아가야 너도 그저 아버지 같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진짜 행복한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사실 여주인공 안나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연애소설이 아니다. 안나는 제 7부에서 자살하지만 번역본으로 100페이지가 넘는 제 8부가 이어진 다음에야 소설은 끝난다. 잡지에 연재될 당시 삭제됐다가 톨스토이가 책으로 내면서 다시 쓴 마지막 부분은 그래서 다소 지루하더라도 꼭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안나의 마지막 모습은 이렇다. 기차가 덮쳐오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오싹한 공포를 느끼며 묻는다. “여긴 어디지? 난 뭘 하는 걸까? 무엇 때문에?” 그러고는 “하느님, 모든 것을 용서해주십시오!”라고 중얼거리면서 생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런데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레빈 역시 똑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 때문에 나는 여기에 있는가?”

레빈은 자살 충동까지 느끼지만 마침내 인생이 무엇이고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는다. 그에게 이것은 특별한 믿음 때문도 아니고 경이로운 순간도 아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사람을 알아보기 시작하고, 아내가 시아주버니를 배려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선(善)의 의미를 찾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나 카레니나』의 핵심은 안나가 아니라 레빈이 삶을 깨우쳐가는 과정이다.

톨스토이는 안나를 아주 냉정하게 죽였다. 그는 쉰 살 이전의 자기를 죽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다. 레빈의 모습으로. 그리고 그렇게 남은 생을 살았다.

물론 현실은 소설처럼 쉽지 않았다. 모든 재산을 내놓았지만 아내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직접 밭을 갈았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양심에 눈을 떴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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