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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마이웨이] 회사에 도움 안되면 당당히 퇴사 … 쉰 살에 21번째 ‘입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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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24면

직장을 스무 번 그만둔 ‘은퇴하는 남자’ 김명섭씨가 서울 마포구 한 레스토랑에서 생존 경쟁력을 키우는 노하우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작가 김도형]

요즘 우리 83학번 동창들 사이에 떠오르는 화제의 인물이 있다. 이 친구와 밥 한 끼 먹으려고 다들 줄을 섰단다. 뭐가 그리 대단한가 싶어 SNS에 들어가 봤더니 문장 한 줄이 눈에 확 들어온다. ‘오늘 21번째 회사로 옮겼습니다.’

<5> 엔지니어링 컨설턴트 김명섭

한국 남자들에게 ‘한 직장 오래 다니기’는 일종의 의무다. 잠깐이라도 가족을 불안에 떨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한 두 달이라도 백수가 되는 건 무책임한 짓이다. 아무리 지겨워도, 눈치 보여도 회사에서 나가라고 할 때까지 버티는 게 원칙이다. 남자들에게 허용된 자유는 고작 포장마차에서 먹는 쓰디쓴 소주뿐이다. 가끔은 술기운에 ‘내가 이 회사 그만두면 갈 데가 없냐’고 소리쳐 보지만 본인도 안다. 그건 단지 ‘객기’라는 것을.

막상 직장을 옮기고 싶어도 가장 두렵고 무서운 건 자기 자신이다. 매일 출근하던 사람이 다음날 아침에 갈 곳이 없는 것만큼 공포스러운 게 없다. 정해진 날 월급이 안 들어온다는 것, 명함 없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무서운 일을 무려 스무 번이나 했다는 놀라운 인간은 도대체 누구인가. 심지어 그의 한 줄 프로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위험을 즐겨라.’

아무리 봐도 단순한 객기는 아닌 것 같다. 나이 오십이 되면 누구에게나 닥치는 ‘은퇴’를 평생 스무 번이나 연습한 남자. 그가 위험을 즐기는 법이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남들보다 이직을 많이 하게 됐죠. 내 의지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상황에 떠밀려 간 적도 많았어요. 대기업부터 외국계 기업, 중소기업까지 두루 다녀봤고 자영업도 몇 가지 해봤죠. 거기서 한가지는 확실히 알았어요. 나는 뭘 해도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웃음).”

어디에서 일하든 신입생 자세로 배워
엔지니어링 컨설턴트 김명섭(51). 연세대 기계공학과 83학번인 그는 기업에 정보기술(IT) 솔루션 관련 컨설팅을 해주는 일을 주로 한다. 직책은 몸담은 회사마다 그때그때 바뀐다. 지사장도 했다가 임원도 했다가 계약직 프리랜서로도 일했다. 심지어 직업도 들쑥날쑥하다. 레스토랑 사장부터 속독학원 원장, 피아노 학원 오너 등 스펙트럼이 무척 넓다. 최근에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해 보려고 구석구석 시장 조사를 다니기도 했다. 우리 또래의 50대 남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불안한 노마드의 삶. 그러나 반대로 보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던 자유로운 삶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인생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첫 직장이었던 삼성에서는 계열사를 돌며 5년 동안 꼬박 회사에 충성을 바쳤다. 맡은 프로젝트마다 성공시켜 회사로부터 표창도 여러 번 받았다. 두 번째로 다시 들어간 삼성자동차에서도 24시간이 모자랐다. 쌍용·기아·현대차 출신들에게 자동차 기술을 배우기 위해 동호회를 6개나 들었다. 일하기도 바쁜 시간을 쪼개 테니스·스키·단전호흡까지 안 해본 취미가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자동차를 내 손으로 만든다는 자부심과 기쁨도 잠시.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돼 버렸다. 1999년 대우와의 빅딜 논의가 오갈 무렵, 회사는 직원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말했다. 간부들은 3명씩 책임지고 나가라. 그 무렵 그는 처음으로 6개월의 백수생활을 했다. 명문대에 대기업 출신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았던 그였지만 불러주는 데가 없었다.

“그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그동안은 인생이 내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외부의 사건에 의해서도 인생이 바뀌는구나. 이제 기업이 나를 책임져 주는 시대는 끝났다. 그렇다면 더 이상 상황 탓하지 말고 그것 역시 내가 책임지자, 그렇게 마음먹었던 거죠.”

그때부터 그의 ‘노마드’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컨설턴트로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까지 PTC코리아, IBM, HP 등 수많은 외국계 기업과 대기업·중소기업을 오갔다. 틈틈이 중간에 속독학원과 피아노 학원을 차린 적도 있었다. 사람들이 가장 놀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변화의 폭이 상하좌우로 너무 넓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한 직장에 다니다 보면 가장 떨어지는 게 바로 유연성과 적응력이다. 대기업을 퇴직한 사람의 유연성은 넓어져 봐야 프랜차이즈 음식점 사장이나 중소기업 임원이다. 최대한 이전 직장과 비슷한 자리에서 두 번째 삶을 꾸려가려고 애 쓰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경쟁은 치열해지고 눈과 귀를 현혹하는 제안에 쉽게 넘어가기도 한다. 수많은 퇴직자들이 은퇴 이후 사업에 실패하는 이유다.

그는 변화의 폭에 한계를 두지 않았다. 98년 외환위기 때나 2008년 금융위기 속에서 전보다 못한 직장으로 옮기거나 대우를 받게 되더라도 온전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어디에서든 신입생처럼 배웠다. 그가 스무 번이나 이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측에서 ‘모셔야 한다’는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자영업자 마인드’로 일하려고 노력했다. 남들처럼 회사의 안정성을 따지기보다 내가 들어가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부터 봤다. 적극적으로 수익을 창출해 회사에 돈을 벌어주고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싶으면 과감히 나왔다. 스스로에게 월급 주는 훈련을 할수록 이직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었다. 대신 월급이 언제 끊길지 모른다는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늘 ‘플랜 B’를 연구했고 끊임없이 시장조사를 했다. 덕분에 그는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이직 전엔 아내와 여행 … 금슬도 좋아져
무엇보다 그가 유연성을 지키는데 있어 강조하는 것이 있다. 바로 ‘아내와의 관계 회복’이다. “은퇴 이후의 삶은 초반에 불안하고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가장 가까운 배우자에게 기대고 쉬어갈 수 있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쉽게 지치고 조급해져서 새로운 열정과 모험정신이 나오기 힘들거든요. 한번은 제대로 아내와 관계회복을 해야 30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들 부부도 한 때는 일과 육아 때문에 남남처럼 지냈다. 남편은 열심히 일해도 집안에서 대접 못 받아 서운했고 아내는 집안일과 육아를 떠넘긴 채 밖으로만 도는 남편이 야속했다. 한 때는 이혼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흔 다섯이 넘으면서 다행히 깨달음이 왔단다. ‘아이들은 결국 떠나게 돼 있고 늙은 나를 챙겨줄 사람은 아내밖에 없다.’

그가 택한 회복 전략은 아내와의 여행이었다. 그는 이직할 때마다 중간의 한두 달을 이용해 함께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내와 유럽·동남아·중국 등 안 다녀본 곳이 없다. 덕분에 요새 그는 제2의 신혼 재미에 푹 빠졌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요리학원에 다니고 그는 아내의 운동화 끈을 매어주는 살가운 남자가 됐다. 한번 진하게 사랑했던 흔적은 없어지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실망과 미움으로 덮여 있었다 해도.

한국의 50대 남자들이 걸어왔던 길은 정해져 있다. 가장이기에 모두 꼼짝없이 가야 했던, 샛길 하나 없는 대로(大路). 그러나 정작 가족에게 왕따 당하는 그 길을 그도 묵묵히 걸어왔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큰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은 골목도 생각보다 걸을 만하다. 가다 보면 막다른 골목이 나올 것 같지만 자신을 믿고 방향을 틀면 또 다른 길이 보이기도 한다. 가족과 함께라면 좁은 길도 어느덧 괜찮은 길이 되기도 한다.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골목길을 걷고 있는 그는, 뒷모습마저 행복해보였다.

김미경 더블유인사이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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