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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논문 통과 문턱에 울고, 교수 프로젝트에 발목 잡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 KAIST 물리학과 A씨(33).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6년이 지난 지금까지 학교에 남아 있다. 5년 내 졸업해야 하는 학교 규정으로 본다면 그는 ‘연차초과자’다. ‘SCI 저널에 논문 게재’란 졸업 요건이 발목을 잡았다. 치열한 경쟁 탓에 논문을 싣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기 때문. A씨는 “SCI 저널에 논문을 싣기 위해서는 이론을 새로 정립하거나 현상을 발견하는 등 교수도 하기 어려운 연구 성과가 있어야 한다”면서 “주변에 논문을 쓰지 못해 학교에 남는 학생들도 수십 명은 된다”고 푸념했다.

# 전자공학과 B씨(35)는 졸업을 앞둔 지난해 말 지도교수의 부탁을 받았다. 그가 참여한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며 한 학기 더 학교에 남아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지난 7년 간 프로젝트에 치여 박사 졸업논문 연구를 어렵사리 마무리한 그였다. 거절할까도 생각했지만 그간 쌓인 정과 혹시나 모를 비난이 걱정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B씨는 “연구실 입장에서 석·박사는 중요한 연구 자원이지만 가뜩이나 취업이 어려운데 나이가 걸림돌이 될지 몰라 걱정”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다시 선택한다면 박사를 선택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국내 최초 ‘연구 중심 이공계 대학원’인 KAIST 석·박사들이 졸업 기한을 넘기고도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은 그들을 학교라는 울타리에 남게 하는 족쇄가 된다. 그러나 논문 중심의 졸업 제도, 지도교수의 권한 남용 등 그 속을 들여다보면 국내 과학기술계의 어긋난 이면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KAIST에 따르면 2014년 교내 42개 학과의 석·박사 과정 학생(일반 장학생 제외)은 모두 4868명으로, 이 가운데 2010년 이전 입학자는 825명(17%)이다.

?가장 오래된 학생은 2002년 입학자(1명)이며 연도별로 ▶2004년 11명 ▶2005년 11명 ▶2006년 38명 ▶2007년 68명 ▶2008년 148명 ▶2009년 188명 ▶2010년 360명이다. 이 중 주요 학과(전기 및 전자공학·생명과학·물리학·기계공학·화학·전산학)생은 491명으로, 이들 학과 전체 인원(2278명) 5명 중 1명이 5년차 이상 박사, 2년차 이상 석사다.

?학생들은 왜 학교를 떠나지 못할까. 이유는 다양하다. 일단 취업은 공통된 문제다. 불투명한 미래, 주변의 높은 기대치가 학생에 부담과 다분한 ‘준비’를 요구한다. 그 준비 중 1순위가 논문이다. KAIST 김연주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논문이 졸업과 취업의 주요 평가 지표가 되면서 학생과 교수가 모두 논문에만 매달리게 됐다”고 말했다.

?KAIST 석·박사는 졸업을 위해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Science Citation Index)에 등록된 저널에 주저자(제1저자)로 1편 이상 논문을 실어야 한다. 네이처, 사이언스, 셀처럼 심사를 거쳐 논문을 게재하는 학술지 가운데 미국 톰슨사이언티픽사(社)가 선정하는 것이 SCI 저널이다. 논문의 인용성과 전문성을 종합 심사한 뒤 상위 10~15%를 선별한다.

?KAIST의 경우, 이런 SCI 저널 중 추가로 교수 회의를 거쳐 ‘졸업 저널리스트’를 뽑는다. 전산학 100여 종, 기계공학 276종, 전자 및 전기공학 113종 등 학과별로 저널의 수와 목록에는 차이가 있다. KAIST 기계공학과 배충식 교수는 “SCI 논문은 학생의 연구 역량과 숙련도를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라면서 “그러나 최근에는 돈을 받고 논문을 실어주는 ‘저널장사’가 생기는 등 저널 자체의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아 회의를 통해 저널리스트를 만드는 것”고 설명했다.

?하지만 SCI 저널은 고작 3750여 개에 불과한 데다 세부 전공으로 들어가면 그 문은 더 좁아진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해 쏟아지는 수십~수백 만 개의 논문 중 2012년 4만7066개 논문만이 SCI 저널에 실렸다. 로봇 분야 연구결과가 반도체나 뇌공학 저널에 실릴 수 없듯 졸업 저널리스트라고 해서 모두 등록이 가능한 것도 아니라 학과에 따라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KAIST에서 장기 미졸업자가 가장 많은 전자과는 교수 1인당 졸업 저널 목록이 1개 수준에 불과하다. 논문 중심의 평가 방식은 미국이나 영국 등과 다른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문화로 꼽힌다.

?심지어 일부 교수들은 연구를 위해 석·박사의 졸업을 막기도 한다. 이공계열 중 과제나 프로젝트가 많은 공학 분야가 특히 그렇다. 프로젝트에 치여 개별 연구를 하지 못하는 석·박사들이 있는 반면, 충분한 지도는 없이 ‘교신 저자(논문을 지도하는 교수)’에 이름을 올리는 교수도 적지 않다. KAIST 대학원 총학생회가 2013년 실시한 ‘연구환경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1337명 가운데 교수의 개인 연구지도 시간이 1주일에 1시간 미만이라고 응답한 인원은 1123명(84%)에 달했다. 5분 이내라고 응답한 인원도 347명(17%)이었다.

?당시 한 KAIST 대학원생은 익명으로 “학업과 관련된 공부보다 실적에 관련해 연구를 강요하고, 연구 성과가 없으면 인건비(랩에서 받는 월급)를 못 주겠다고 협박하기도 한다”고 적었다. 김연주 총학회장은 “학생이 졸업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비단 개인의 문제는 아닐지 몰라도, 교수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비단 KAIST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반대학원 이공계(공학·자연·의약) 박사과정 입학자는 2011년 1만764명에서 2013년 1만3183명으로 2419명 증가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졸업자는 6977명에서 7342명으로 365명 느는데 그쳤고, 입학자와 졸업자 간 차이는 3000여 명에서 6000여 명으로 1.5배가량 증가했다. 학교에 남는 사람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얘기다.

?해마다 석·박사 대학원과 진학률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공계 석·박사의 졸업과 진로에 관한 투명한 정보 제공과 대학의 과도한 권한 사용을 제재할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박정렬 기자 lif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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