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2)경주시 동방동 「신라요마을」|천년영화의 숨결 어린 신라토기를 재현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역사의 바퀴자국에는 언제나 유·무형의 유산이 남게 마련이지만 천년 신라의 영화가 맴돌던 고도 경주의 뒷길엔 그 문화의 조각들이 숱하게 깔려있다.
기원전 1세기께부터 만들어져 신라시대를 꿰뚫어 사용되었던 신라토기도 그 많은 유산가운데 한 파편.
수수백년을 금속예술과 함께 고분 속에서 숨쉬다 20세기 문명 앞에 신비의 모습을 드러낸 선조들의 솜씨다.
그 솜씨가 신라인들의 것이었던 게 5세기께 일본으로 건너가「스헤기」(수혜기)라는 토기를 출현시켰으면서도 정작 우리들에겐 단절되어 있었다.
실로 천년세월을 건너 뛴 오늘에 와서 선조의 솜씨를 되살려보려는 화랑의 후예들이 서라벌 옛터에 가마를 지었다.
경주시 동방동 신라요.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8㎞쯤 떨어진 고도의 관문이자 불국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손과 옷에 온통 흙칠을 한 7∼8명의 도공들은 자신이 돌리고 있는 물레가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돌려놓기라도 하는 듯 선인의 숨결을 찾아 인내와 정성을 기울이고있다.
대대로 옹기를 구워온 집안에서 태어나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흙을 만지며 자라온 유효웅씨(40), 그와 뜻을 같이하여 흙과 함께 하루를 보낸다는 같은 마을 송봉빈씨(42), 10년 이상 흙을 만지다보니 손에 흙 살이 굳었다는 유태진씨(42), 그리고 효웅씨의 동생 진룡씨(29) 등 8명이 신라요마을을 키워온 사람들이다.
이곳 신라요에서는 금관과 함께 출토되어 국보로 지정된「인물기마주인상」을 비롯, 일상용품이었던 장경호(목긴병)·고배·각배·영배와 사자를 위한 골호·곤귀형·거형·불기·등잔 등 5백여 점이 옛 모습 그대로 만들어진다.
3백 여종의 작품이 진열된 전시실에 들어서 사면 가득히 늘어선 잿빛토기의 은은한 질감을 감상하노라면 그 옛날 신라인들이 향유했던 생활의 멋과 수준 높은 예술감각이 피부에 와 닿는다.
『아무리 작품제작에 몰입한다고 해도 생각이 옛 사람들의 상념과 일치하지 않으면 선조들이 만든 것과 같은 오묘한 형상은 나올 수가 없지요. 남들이 보기에 비슷하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모방입니다. 가치 있는 작품과는 거리가 한참입니다.』 30여년간 흙을 주물렀으면서도 만족할만한 작품은 거의 없었다고 유씨는 말한다.
신라토기의 특징은 고려·이조 때의 청자나 백자와는 달리 유약을 전혀 바르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흙 빛깔인 회청색에 있다. 또는 섭씨 l천도의 고열로 구울 때 생긴 연유의 비색이 변함없이 간직되어 있는 점이다.
신라토기는 경주일대에 매장되어있는 태토를 원료로 한다. 천마총·황남대총, 금관총 등 신라고분에서도 수천점 출토된 토기들은 그 제조기술이 신라인들의 독창적인 것이어서 다른 지방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모든 예술품이 그렇듯이 신라토기 또한 아무리 소품이라도 하루 이틀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흙에 수분을 적당히 먹이면서 반죽하는 데만 3∼4일, 이를 물레에 얹어 형태를 가다듬으면 건조실로 옮겨져 한달 동안 그늘에서 말린다.
이곳에서 금이 가거나 흙 속에 바람이 들어 못쓰게 된 것을 골라낸 뒤 가마로 들어가면 1주일간을 밤낮 없이 섭씨 1천도를 유지하며 불질을 한다. 다른 도자기와 달리 기름대신 나무를 연료로 써야하기 때문에 사람이 항상 옆에 있어야 한다.
『섭씨1천도 이상인 불의 강도에 따라 몇 달의 고생이 일순에 사라지기도 합니다. 가마 문을 열고 작품을 꺼낼 때의 두근거림은 감격과도 같습니다.』
유씨는 절반쯤 건지면 다행이라고 한다. 빛을 본 토기는 연대처리를 위해 태토푼 흙탕물에 삶고 닦아내고 하여 또 10여일.
한 개의 완성품이 나오기까지는 최소한 3개월이 걸린다. 이 모든 과정은 어둠 속에서 빛을 그리는 순교자와 같은 기구가 필요하다.
『우리 신라요를 찾아와 기술배우겠다는 사람이 많지만 1년간 흙 반죽만 시키니 모두 달아나더군요.』
10년을 빚어온 봉진씨는 마음의 정성 없이는 흙일 할 생각 말아야 한다고 한다.
한 달에 구워내는 각종 토기는 5백여 점. 연간 6천여 만원의 매상을 올린다.
일본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기마상은 l개에 10만원, 목긴병이 3만∼5만원이다.
『이문 내려면 적당히 만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 선조의 얼을 재현한다는 생각에 아직은 원가계산 없이 해냅니다.』
유씨는 이곳의 10년 경력자가 3명, 나머지는 5년 이상 흙일한 사람들이란다.
『10년 넘어 흙일한 사람의 월급이 50만원입니다. 미장이도 이보다는 더 받을 거예요.』 유씨는 월수 따위 따지지 않고 신라인의 향기를 뿜어 내주는 도공들이 한없이 고맙다고 한다. <경주=홍성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