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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을 떡 주무르듯|다보탑·석가탑을 재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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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흰빛이 더 강하게 돋는 쑥색 화강석에서 잘 생긴 돌의 온화한 체온이 눈에 와 닿는다.
거대한 백설기 떡을 썰어놓은 듯 네모가 반듯반듯한 둘, 돌들.
한집 건너마다 돌들이 널려있고 한집 건너마다에서 나는 정 소리가 화음을 이룬다.
전북 익산군 황등면 황등리. 이곳이 바로 동양에서도 그 이름이 높은 황등석의 마을이다.
이리 시에서 익산평야를 가르며 23번 국도를 따라 북으로 11km. 갑자기 시야를 가로막는 황등산은 반 이상이 소나무로 덮여있지만 사실은 표토만 벗기면 모두 돌덩어리다.
철분이 적어 변색이 안 되는 데다 잘 부스러지지 않고 강해 알아주거니와 매장량은 무진장이라 할만큼 풍부하다. 연간 석재생산량은 4만9천8백91일방m(면추계)..
지금부터 60년 전에 일인들이 들어와 채석에 손을 대 만주에 위령탑을 세운다고 실어간 뒤 세상에 알려져 일본이 주 수입 국이 되었고 수출이 피크에 달했던 70년대 초엔 정원석등 1만1천 5백 52입방m 가 선적되었다.
『온통 돌덩어리에 돈 덩어리 산이여』산은 면적이 3만여평에 해발 67·6m에 불과하지만 일대가 평야지대라 황등면 에서는 가장 높은 산.
임자는 따로 있어도(황등산업)황등리 주민 3백50여가구가 이산에서 나는 돌을 가공해 생계를 꾸리고 있다.
간판을 내건 석 물 공장만도 20여 곳이나 되지만 한 두 사람 개인이 돌을 다듬는 곳까지 치 면 일일이 손꼽을 수 없을 만큼 석 물 공예가 성한 곳이다.
『청와대 영빈관도 여그 돌 갖다 지었고 자유당 때 이승만 박사 동상 좌대도 여그 돌로 맨든줄 몰라?』
20세 때부터 46년째 이곳에서 돌을 다듬어온 석수 김삼득씨(66작)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화강암은 심성암의 하나로 석영·정강석·운모 등이 주성분. 견고하고 아름다워 건축·토목용재로 쓰이고 또 조각공예에 널리 쓰인다.
황등석으로 빚는 공예품은 장명등·망왕석·문신상·무관상·동물상이 대표적인 것.
무딘 돌을 떡고물 반죽하듯 석굴암 불상이며 불국사의 다보탑·석가탑을 재현해내는 이마을 석공들은 비록 적은 일당이지만 찬란한 신라문화를 이룩했던 거장 아사달의 후예라는 긍지로 산다.
황등석과 인연을 맺고 사는 사람은 황등면 인구의 4%에 불과하지만 소득은 높아서 황등면 연간 총생산 가운데 황등석이 차지하는 비용은 l5·4%나 된다. 『73년부터 4∼5년 동안은 사흘만 일을 해도 쌀 한 가마 값을 벌었지요.』
석수 강??희씨(33·황등면 신기 부락)의 말이다.
경기가 좋을 때 돌을 가공하는 기계까지 등장했으나 석유파동으로 세계경기가 침체의 늪에 빠지면서 수출량이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요즘은 기계를 차린 공장들은 한산하기까지 하다.
『돌은 역시 손으로 다듬어야 혀.』 석수가운데 최고 원로인 김삼득씨는 바로 그 때문에 기계공장을 차리지 않았다고 했다. 하나의 돌덩어리가 하나의 작품이 되어 나오기까지에는 석수의 온갖 정열과 혼이 배어야 하는데 그게 기계만으로 되겠느냐는 이야기다.
황등산에서 옮겨온 돌은 우선 상석이나 망주석 등 그 용도에 따라「보래질」의 과정을 거친다. 길이가 5m쯤 되는 쇠쐐기를 이용해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자르는 것.
거친돌 위에 먹줄을 긋고 돌을 다듬기 시작한다. 정으로 돌출한 부분을 때려가며 전체적인 평면을 이룬 다음 「거친다듬」「고운다듬」「잔 듬」에 이어 물을 끼얹고 숫돌로 다시 윤기를 낼 때까지의 과정 하나 하나에 석수의 비지땀이 배어든다.
손으로 주무를 경우 상석이라면 원석에서 윤기가 날 때까지는 보통 l주일쯤 걸린다. 여기에 다시 글씨를 쓴다면 적자에 1일씩 계산이 추가된다.
『3년은 혀야 돌을 맽길 수 있어.』김씨는 3년을 한 뒤에도 돌을 다듬다 조각이 떨어져 나가는 실수를 몇 번씩 저질렀다고 했다. 그때마다 그는『돌이 나빠서 그렇다』고 했으나 천만에 말씀이라는 것.
어른 키 만한 장명 등 하나 만드는데 3∼4명의 고참 석수가 매달려 열흘이 걸린다. 주문의 경우 원하는 꽃무늬 동물무늬를 넣자면 보름. 하나 값이 20여만 원을 홋가한다.
『품위 있는 정원을 꾸밀 라면 역시 우리 황등석이여. 돌은 쇠붙이보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뱁 이거든.』 석수 김씨는 어깻죽지가 저리도록 멋들어진 작품을 수없이 내 보냈어도 자기 집 마당에 놓고 감상하며 살날이 있을지 모르겠다며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솜씨 좋은 김씨의 한달 수입은 40여 만원.
더더구나 요즘은 호화묘소금지니 호화주택조사니 하여 수출주문도 적은데다 정원석등 공예품 주문이 없어 일거리 떨어지는 게 큰 걱정이라고 한다. 가장 힘든 게 석등의 속을 파는 것.
요즘은 기계로들 파내지만 손으로 할 경우 조금만 신경을 다른데 써도 조각이 떨어져 나가버린다.
그래서 김씨도 10년이 넘어서면서 석등을 만졌고 20년이 넘어서면서부터 불상을 만졌다.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를 피워낼 수 있어야 완전한 석수가 되지.』막일은 해도 돌 다듬는 일 배우겠다는 젊은이가, 안나오는 게 너무 고생스럽기 때문이라고 김씨는 말한다.【이리=오홍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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