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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왜 돌지 않는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시중에 풀려있는 돈이 결코 적은 양이 아닙니다. 오히려 풀린 돈은 많은데 피댓줄 벗어진 방앗간 기계처럼 겉돌고 있는 것이 문제예요-.』 (안상국한은자금담당이사)
『금년들어서 어디 적당한 어음나온것 없느냐는 전화가 자주 걸려와요. 대부분 안심하고 돈놀릴데를 알선해 달라는 은밀한 부탁들이지요-.』 (모단자회사 K전무)
어느 모로 따져봐도 시중에 돈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지난 14일 발행된 한전채 2백50억원은 그날 하루에 바닥이 났고 다음날 나온 양각증권 2백억 원도 증권회사들이 앉은자리에서 훑어가 버렸다.
작년 재작년 같으면 억지로 떠맡겨도 잘 안 팔리던 것들이었다.
기업들이 발행하는 회사상도 나오기가 무섭게 동이 난다.
줄을 내어 사전청약을 해야 차례가 오고 인수만 하면 투기바람을 탄 「아파트」처럼 즉석「프리미엄」을 붙여 채권시장에 팔아 넘긴다.
사채발행을 의뢰해오는 기업들에게 앉아서 절받던 증권회사들이 이젠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채발행 주선을 서로 갖겠다고 굽신거리기에 바빠졌다.
백모씨가 50여억원어치를 샀다는 3년짜리 산금채나 개발신탁은 이달들면서 은행측의 손실을 이유로 모두 발매를 중단해버렸다.
주택자금은 계속 나가도 건축허가면적은 여전히 줄어들기만 한다. 은행돈 빌어다 지은 집을 사기만하고 짓겠다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이 모두가 전에 없던 일들이다. 분명히 돈이 제길을 이탈하여 미로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금년들어 4월중순까지 늘어난 저축성예금은 5천9백억 원. 그 동안 풀려나간 돈의 절반가까이가 은행금고로 되돌아온 셈이다.
그것도 나간 즉시 되돌아오는 것이 최근의 특징이다. 게다가 돈이 넘쳐흐른다는 곳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돈장사하는 곳들이다. 은행·단자회사·채권시장 등등….
아무리 돈을 풀어도 잠시후면 이쪽으로만 꾸역꾸역 몰려든다. 분명히 기업들 손에 돈을 쥐어주는데도 공장 돌리거나 물건 만드는데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금융시장 안에서만 뺑뺑 돌면서 이자나 파먹자는 것이 대세다.
실물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윤활유역할을 하는 것이 돈인데 요즘은 실물경제 따로, 돈 따로 놀고있는 것이다.
은행에서 기업에 대출해주면 생산에 필요한 종업원 봉급이나 원료구입등에 쓰여지고 이 돈이 구매력이 돼서 소비를 촉발하고 물건을 판 기업들에 다시 돌아와 투자를 일으키는…, 이른바 돈의 정상적인 순환과정이 생략된 채 겉돌고 있는 것이다.
대체 왜 이같은 이상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우선 우리나라 기업들이 만성적인 빚쟁이라는 것이 문제다. 은행돈을 빌어다가 생산활동에 쓰는 것보다 당장 밀린 빚갚는데 급급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은행부채는 제쳐두고서라도 기업들이 회사채를 발행해서 진 빚만 따져도 2조원이 넘고 지난 한햇동안 발행한 9천억원 중에서 1천7백억 원이 순전히 빚갚기위해 또 빚을 진 차환발행이었다.
경기가 좋을 때면야 빚을 걸머지고서라도 공장을 짓고 제품을 만들어서 번 돈으로 이자돈을 내가며 꾸려갈수 있겠지만 만들어야 팔리지도 않는 형편이니 빚부담은 더욱 무거워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불황의 불안 때문에 빚독촉까지 심해져 가만히 있던 빚들도 당장 갚으라고 야단들이었다.
이러니 운행에서 기업들에 돈을 빌려줘도 곧장 채권자들(사채업자이건 기업주 개인이건간에) 손에 넘어간다.
『그러니까 급한 빚을 갚으라고 기업들에 돈을 많이 대주는 것이고 웬만큼 정리되면 사업에 투자할 여력이 생겨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실제로 그 동안 돈이 많이 풀렸고 이를 계기로 경기가 필 것을 모두가 기대했었다. 물가불안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러나 워낙 기업들의 빚규모가 밑빠진 독인데다 설령 여유자금이 생겨난 튼튼한 기업이라 할지라도 사업을 적극적으로 늘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탐욕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던 기업의욕들은 다 어디 가고 삶아놓은 파처럼 축 늘어져있는 것이다. 위험부담을 안고 투자를 하느니 안전한 정기예금이나 수익률 높은 채권이나 사두겠다는 경향이 팽배해있다.
물가를 따져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라는 불평은 이미 뒷전의 일로 되어버렸다. 그만큼 기업들의 투자 마인드가 위축된 때문이다.
돈만 풀면 금세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믿었던 기대가 큰 차이로 빗나간 것이다. 공연히 엉뚱한 뭉칫돈이 금리를 따라 부동하는 바람에 돈장사만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이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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