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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상을 압축한 단수가 시조의 본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단수와 연작>
이웃에 봄을 나눈
살구꽃 그늘 아래
도란 도란 애기들은
소꿉질에 잠차졌고
상치 씨
찾는 병아리
돌아올 줄 잊었다.
작고한 시인 이영도 선생의 『봄Ⅱ』이다. 시조는 원래 시절가조라 하여 계절이건 인심이건 시절을 노래한 시였다. 그리고 시제라는 것을 붙여서 노래했던 것도 아니고, 더더구나 연작이니 하여 여러 수를 엮어서 한 편의 작품을 이루었던 것도 아니다. 하기 때문에 시조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이 단수에 있다는 것을 말해둔다. 일본의 단가니 배구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시조의 본을 떠서 시제를 붙이는 일도 없고, 노래 속에 반드시 계절이 나오며, 더더구나 연작이라는 것은 없다.
여긴 내 신앙의 둥주리 낙동강 흥건한 유성/노을 타는 갈밭을 철새 떼 하얗게 날고/이 수천 행구는 가슴엔 「세례요한」을 듣는다.
석간을 펼쳐 들면 손주놈 「고바우」를 묻는다/혀끝에 진득이는 이 풍랄 감칠맛을/전할길 없는 내 어전 모국어도 가난하다.
네 살 짜리 손주놈은 생선뼈를 창살이란다/장지엔 여릿한 햇살, 접시엔 앙상한 창살/내 눈은 남해 검붉은 녹물 먼 미나마따에 겹친다.
역시 이영도 선생의 『흐름 속에서』라는 작품이다. 이런 시상을 한 수에는 담을 수 없다. 현대인들의 복잡하고 다기한 생활상을 삼장 육구의 단수에는 다 담을 수 없어 자연발생적으로 이어져 나간 것이 오늘날의 연작시조라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 두어야할 일은 아무리 연작이라 하더라도 수마다 떼어놓고 보아 한 수 한 수가 다 작품이 되어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또 한가지 알아둘 일은 삼장 중 어느 한 장은 꼭 풀어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격조 또는 경>
아무리 학문이 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품이 높지 않으면 우선 그 사람은 사람으로서 낙제다. 시조가 아무리 좋은(?) 뜻을 담았다 하더라도 격조가 높지 않으면 낙제다.
난 있는 방이든가, 마음 귀도 밝아온다/얼마를 닦았기에 논 빛마저 심심한고/횐 장지 구만리 바깥 손 내밀듯 뵈인다.
김상옥 선생의 작품 『난 있는 방』이다. 밝고 맑고 청정하기까지 한 시다. 삼장 단수에 갈무러져 있는 간절한 시상을 마치 한잠 백지장을 떠올리듯 건져내고 있다. 「흰 장지 구만리 바깥 손 내밀듯」내 뵈는, 정말 눈빛까지 심심한 작품이다. 이 무욕, 이 허심, 시가 여기에 이르면 하나의 비의 경지에 들었다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시의 품격, 다시 말해서 시조의 격조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작품이다.
다음에 하고싶은 이야기는 「경」의 이야기다. 자유시와 시조의 상이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자유시에 있어서 의가 시조에 있어서는 「지」요, 자유시에 있어서는 이 시조에 있어서는 「관」이라는 이야기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유시에 있어서 「유」는 시조에 있어서 「풍」이라고나 할까.
이쯤은 지면의 논고에서 일일이 작품까지를 들어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점에 있어서 자유시가 시조에서 배워갈 것이 있을지언정 시조가 오늘의 자유시쯤을 아무 것 하나 의식할 것은 없다는 이야기다.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연주할 때나, 시조창을 할때도 그 「경」이라는 것이 있다. 가사 『동산일출』이라든지, 『평사낙안』이라든지, 『주마축지』라든지, 『경조탁사』라든지. 우리시조의 종장에도 이런 「경」이라는 것이 있고 또 한수 한수에는 수마다 시정신의 뿌리가 그 경이라는 것에 가 닿아야하는 것이다.
즉 희이거나, 비거나, 애거나, 악이거나, 구, 적, 고, 멸, 근, 원, 직, 우, 묘, 현, 무어 동양정신의 뿌리가 어느 경에 가 닿긴 닿아야하는 것이다. 너무 전문적인 이야기가 되었지만 아무튼 시조란 자수만 맞으면 되는 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둔다. 【정완영(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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