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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긁어 부스럼』이 싫었던 「브레즈네프」|균형위의 권력안주 노려|노령권력 핵심 유임으로 새 불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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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26차 소련공산당대회 결산>
지리할 정도로 평탄했던 아흐레동안의 제26차 소련공산당대회는 지난3일「뉴스」아닌「뉴스」를 낳고 막을 내렸다.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정치국 정위원 14명, 후보위원 8명, 당서기 10명 등 전원유임-. 1917년의 혁명이후 소련권력구조가 이처럼 꼼짝않기는 처음이다. 지도부 개선에서 드러난 이 「현상유지」는 경제정책에선 현실주의로. 대의정책에선 명분을 내세운 실리주의로 조금씩 변형되면서 이번 대회의 밑흐름을 이뤘다.

<협력구조의 잠정고착>
권력핵심에 큰 변화가 없었으리라는 것은 예상됐었다. 하지만 지난해 말이후 일련의 인사조치로 내각과 군사령관급이 조금 젊어지고 지방당간부의 40%가 바뀌는가하면 당중앙위도 젊은층을 받아들이기 위해 2백87명 정원을 3백19명으로 늘리고 35%를 새사람으로 뽑는 등 세대교체바람이 불고있는데 비추어 정치국에서도 한두사람의 이동은 있을 것으로 믿어졌다. 최고령인 「펠셰」통제위원장(82)과 병약한 「우스티노프」국방상(72)의 퇴진, 「아히포프」제1부수상(73)이나 중공업전문가「돌기흐」(55)의 정치국원 승진, 「로마노프」(57)의 당비서 겸임 등이 추측되었다.
전원 유임된 정치국의 평균 연령은 69세, 후보위원 65세. 누가봐도 지나치게 노화한 지도부지만 「브레즈네프」는 굳이 개편의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이다. 서방관측통들은 그 이유를 ▲꼭 내쫒거나 기용해야될 인물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데다▲형식적 개편은 득은 별로 없는 반면 그 충격파는 후계다툼을 새삼 촉발할 수도 있으며▲은근히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세력집단(「키릴렌코」의「드네프르」파·「체르넨코」의「몰라비아」파·군부 등)간의 미묘한 균형을 깨지 않기 위해서라고 분석했다. 「브레즈네프」체제의 가장 큰 특징인 「안정과 지속성」원칙이 그대로 적용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지금부터다. 「펠셰」는 논의로 해도 정치국원의 3분의1은 곧 8순에 육박한다. 또 점차 거세지고 있는 변화(세대교체)의 바람과 군사기술 「엘리트」들의 치받음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전력개편은 있을 것이다. 지도층이 「5년간의 유예」를 받았다지만 당 중앙위는 언제든지 비밀회의를 열어 누구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 64년「브레즈네프」가「흐루시초프」를 밀어낸 것도 이 방식으로였다.「브레즈네프」의 권위는 아직 절대적이지만 권력핵심의 동맥경화증은 언제든지 내출혈을 일으킬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경제목표의 현실타협>
제1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81∼85년)의 특징은 심각한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목표설정의 현실화」다.
「브레즈네프」와「티호노프」수상·「메시야트」농업상은 대회연설에서 이례적으로 소련이 경제난국에 처해있음을 시인했다. 『곡물과 육류·우유·사료생산,「에너지」개발 등에 부진하며 지난 5개년계획 목표달성에 차질이 많았다』는 것이 요지. 이에 따라 경제부문에서의 안정과 절약·합리화 등이 주창되면서 11차계획의 지표는 어느때보다도 현실적으로 책정됐다.
5년간 GNP성장목표 18∼20%는 2차대전후 가장 낮은 수치다.
그러나 소련으로선 현실화했다는 이 지표도 객관적으로 보면 여전히 힘겹다는 것이 경제전문가들의 평이다. 곡물생산목표만 봐도 연평균 2억3천8백만∼2억4천3백만t으로, 사상최대의 풍작이었다는 78년 생산량보다도 많다. 현실화의 한계는 경직된 경제체제 탓이다. 서방식 경제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소련경제는 관 주도형·중앙집권방식의 경제를 고집하고 있다.
이때문에 창의성과 개혁의지는 발휘되지 못하고 생산성저하의 악순환만 되풀이된다.
경제체제의 근본적인 합리화가 없는 한 소련경제의 현실화는 전술적인 숫자조정에 그치리라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대외정책과 평화공세>
이번 대회의「하이라이트」는「브레즈네프」가 첫날 기조연설에서 내놓은 미·소 정상회담제의와 「동서긴장완화 8개항제안」이었다.
「브레즈네프」의 이 포괄적인 평화제안에 대해 미국 등 서방측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조심스럽게 반응을 보이고있다.「브레즈네프」제안은 「유럽」과 미국을 떼어놓기 위한 술책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가안보에 과민하고 「나토」의 「미사일」배치를 은근히 꺼리는 서구국가들이 이 제안을 환영할 것이고, 자연히 강경파「레이건」의 미국과는 균열이 생기리라는 논리다.
「브레즈네프」는 이 모든 것을 다 계산했을지도 모른다. SALTⅡ문제 등「레이건」행정부의 강경성을 감안한 듯한 양보조항은 본질적으로「브레즈네프」식 국제전략의 정석에 따른 것이다. 집권후 근 20년 동안「브레즈네프」는 서방과의 대화를 스스로 단절한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실리면에선 항상「얻는」쪽이었다.「데탕트」에서 미국보다 소련이 더 득을 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72년 「닉슨」과의 「모스크바」정상회담에서, 73년의 핵전방지회담에서, 75년 「헬싱키」협정에서 득을 본 사람은 항상 「브레즈네프」였다. 68년「체코」침공, 80년 「아프가니스탄」침공도 그의 입장에선 승리다.
그러면서도 소련의 실익이 걸린 「폴란드」「아프가니스탄」문제에선 한치의 양보도 하지않았다. 「엘살바도르」「게릴라」문제에 대해서도 당 대회는 군사정부에 대한 좌익인민의 투쟁을 굳게 약속했다.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노리는「브례즈네프」전략은 이번 대회에서도 뚜렷이 드러난 셈이다. <정춘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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