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쇠막대기 하나로 소리의 신비를 캐낸다|피아노 조율사 김영수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가세가「피아노」를 자주 접할 만큼 부유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빈곤하기까지 한 가세 때문에 학교도 국민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악보를 읽을 줄도, 노래 한 곡 제대로 연주할 줄도 모른다.
그런데도 평생「피아노」곁을 떠나 본적이 없는 김영수씨(56·서울 도봉구 미아3동 228의48).
「피아노」건반의 88개「키」하나하나 마다에 정확한 제소리를 찾아주는 게 김씨가 하는 일이다. 조율사.
변변찮은 학력 때문에, 못 배웠다는 오기 때문에 오히려 집념으로 덤벼 자신의 깊숙한 곳에 묻혀있던 보석 같은 음감을 개발해 남다른 경지를 개척한 조율사다.
그는 양악기제조가 불모지대였던 이 땅에서 최초로 「그랜드·피아노」를 개발해 결국 이 나라를 「그랜드·피아노」수출국이 되게도 했으나 세상에 알려지지도, 박수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채 그는 그저 뒤안길만을 걸어왔을 뿐이다.
서울 충무로에 자리했던 정본악기점에 취직한 것이 17세 때인 1942년.
일본인 정본씨 밑에서 배운 것은 낡은 「피아노」의 녹슨 선을 닦아 내거나 내부를 분해해서 부속을 손질하는 게 고작이었으나 오히려 그 같은 사소한 일들이 김씨로 하여금「피아노」의「소리를 내는 구조」에 대한 이해를 튼튼하게 해준 재산이 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정본악기점을 인수한 김재창씨(영창「피아노」의 현 사장 김재섭씨의 형) 밑에서 김씨는 처음으로 조율을 배웠다.
「피아노」건반의「키」하나하나가 내는 소리는 만고불변 이어야한다. 이 만고불변의 소리를 지키고 이어나가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Y자형의 표준음쇠막대.「피아노」88개「키」가운데 왼쪽으로부터 49번째「키」가 내는 소리『라』가 바로 이 쇠막대를 물체에 두드렸을 때 내는 소리와 같아야「제소리」 인 것이다. 49번째「키」를 눌렀을 때 그 소리가 나도록 선을 죄거나 늦춘 다음 화음을 짚어가며 나머지 건반의 제 소리를 찾아주는 게 바로 조율이다.
처음에는 49번째「키」의 소리조차 쇠막대의 소리와 일치했는지 여부를 가늠 못한 채 너무 죄대 다가 선도 무수히 끊어먹었지만 점차 『귀가 트이더라』고 김씨는 회상한다.
귀가 트이면서 외부 조율도 나갔다. 고객은 주로 학교나 고관집. 장안에 악기점이 세 군데밖에 없는 데다 조율사가 10명도 못되던 시절이라 새파란 나이에 인력거로 모셔지는 경우도 있어서 우쭐하기도 했고 그 우쭐한 마음은 더러 실수를 불러오기도 했다.
이대에서 60대의「피아노」를 조율할 때. 소리의 마술사쯤으로 알았는지 아리따운 학생들이 조율 중인 김씨를 둘러싸고는 부러운 시선을 보내며 많은 말을 걸어왔다. 마음이 풍선이 되면서 우쭐해질 수밖에. 결국 60대의「피아노」가운데 조율이 제대로 된 건 한대도 없는 소동을 빚고야 말았다.
『고요한 마음으로 어린애 다루듯 해야 하는 건데…결국 선배 한 분이 뒤쫓아와 다시 조율을 하는 창피를 당했지요.』
당시의 조율비는 「피아노』한대에 『구두 한 켤레 맞출 수 있는 정도』였으나 장안에 「피아노」가 많지 않아 돈을 벌 수는 없었다. 그저 밥을 먹는 정도.
그러나 김씨도 딱 한번 돈을 벌어본 적이 있다. l·4후퇴 때 대구 피난시절. 사람만 피난간 게 아니라 전국의「피아노』도 부산 대구로 몰렸고 김씨가 피난간 대구에는 조율사가 한사람도 없었던 것. 김씨는 이때 장가밑천을 마련해 수복 후 결혼도 했고 그래도 돈이 남아 「피아노」수리점·「오르간』공장·「피아노』공장 등「관련사업」까지 벌였으나 이「의도」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계기가 되어 김씨는 58년 삼익 「피아노」의 창립사원으로 들어가게 됐고「그랜드·피아노」개발에 숙명적으로 손을 대게된다.
첫 개발에 착수한 게 67년10월. 연습용「피아노』는 우리 손으로 만들었으나 연주용인 「그랜드·피아노」는 모두를 수입해오던 때였다. 미국 「볼드윈」(Bildwin) 악기 회사와 기술제휴를 했지만 미 측에서는 「그랜드·피아노」1대만 보내왔을 뿐 설계도조차 주지 않았다.
별수 없이 보내온 「피아노」를 해체한 뒤 부속 하나 하나를 그대로 모방·조립하는 「막고 품는 방식」을 썼다. 일은 쉬웠다. 적어도 1차 완성품의 겉모양은 미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랜드·피아노」는 「키」를 가볍게 눌러도 소리를 내는 연타가 가능해야하는데 그렇게 되길 않았다.
『어쩐지 일이 너무 쉽다 했지요) 그로부터 소리에 매달려 피나는 씨름을 계속하기 30개월. 「소리의 신비」를 체득할 무렵 김씨는 한 대의 「그랜드·피아노」앞에 섰다. 성공한 것이다.
70년5월 국내 저명한「피아니스트」와 음악교수가 초청된 품평회에서 격찬을 받던 날도 김씨는 사람들 멀리 뒷골목 대폿집에서 한잔의 소주를 앞에 놓고 혼자 울었을 뿐이었다.
지금 그「그랜드·피아노」는 세종문화회관과 국내 주요대학에 자리를 잡았고 작년 삼익 「피아노」에서 만도 3천대나 미주와「유럽」지역에 수출됐다.
회사에서는 그 공로로 79년 퇴직 때 대리점까지 하나 내줬으나 잔뜩 손해만 본 끝에 작년 말 손을 떼어 버렸다.
그리고 김씨는 지금 다시 표준음쇠막대만을 들었다. 이번에는 혼자만이 아니다. 아버지 일을 곁눈질하던 외아들 학만씨(26) 까지 표준음쇠막대를 든 것. 조율사 2대가 된 셈이다.
『서울에 있는 5백여 명의 조율사 가운데 3백여 명이 제게서 조율을 배워갔지만 막상 가르치지도 않은 아들녀석이 조율을 해보겠다고 했을 때는 좀 당황했습니다.』
그때 아들에게서 자신을 닮았는지도 모르는 음감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생각이 앞섰지만 잔잔하게 젖어오는 아픔도 적지 않았다고 김씨는 털어놓는다.「피아노」한대 조율비가 1만5천원∼2만원.
그 조율이 요즘은 부자가 함께 뛰어도 한 달에 10대를 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피아노」는 1년에 한번씩은 조율을 해줘야하지만 불황이라 대부분의 가정에서 그마저 꺼리는 것이다.
김씨는 골목을 지나다가도 「피아노」소리가 들려오면 연주되는 곡명은 몰라도 「피아노」의 제 소리가 나는지는 집어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그랜드·피아노」를 조율할 수 있는 단 10명 정도의 조율사 가운데 한사람이다. <오홍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