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숨진 동생의 비석을 찾아…|미국인 「마거릿·무어」(한국명 모진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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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내 하나 뿐인 남동생 「제럴드·마틴」은 6·25 전쟁 때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마틴」은 거제도에서 의사로 포로수용소에 있는 많은 포로들을 위해 일했다. 거제도에서 같이 일하던 미군들이 내 동생의 슬픈 소식을 듣고 돈을 모아 작은 기념 병원을 거제도에 세웠다. 포로 수용소에 있는 포로들이 자기 손으로 기념비 석문을 새겼다.
그때 나는 「필리핀」에 가 있었는데 2년 후에 돌아와서도 내 동생의 기념 병원을 찾아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후 그곳에 심한 태풍이 몇 차례나 불어서 그 기념병원 한쪽 지붕이 무너져 버렸다. 포로들과 미군들이 떠나간 후에는 그 병원을 돌아볼 사람이 아무도 없게되었다.
내 동생 유족으로 아내 「버지니어」와 두 아들 「라벌트」·「제럴드」가 있다. 학교선생인 그 아내는 두고두고 그곳을 찾아보기를 원하다 작년 6월 서울에 왔다.
내 가까운 친구 방철원·김종회 내의가 우리를 위해 거제도에 있는 자기 친구 최이순 선생님계 전화를 걸어 주었다.
부산까지는 비행기로, 부산에서는 아름다운 배로 거제도까지 갔다.
거제도에서 우리는 어떤 한 남자의 안내로 정박아교육기관인 애광학교에 도착했다.
28년 동안 고아원이었던 애광원이 애광학교로 바뀌었다. 최이순 선생님은 애광학교 이사장이시다.
그날 저녁에 특별히 맛있는 음식들을 즐기면서 내 남동생과 내 아버지에 대한 얘기들을 나눴다. 내 아버지께서는 한국독립운동의 한 부분을 담당한 공로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으셨다.
또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랜 후에 박정희 대통령 정부에서도 표창을 받으셨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최기룡 애광원 총무님께서는 자기가 함흥에서 거제도로 피난왔으며 포로들이 있을 때도 같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어느 미국의사의 비석에 대찬 얘기도 들은 일이 있다고 하면서 찾아낼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다음날 비석을 찾으러 자동차를 타고 떠날 때 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바다를 끼고 돌아서 산골짜기 오솔길에 멈췄다.
바로 그때 최기룡 총무는 『그전에 포로들의 묘지였던 장소입니다』고 했다 보니까 논밭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10만 명의 포로들이 있던 곳이라고 말했다.
내 눈앞에는 그 때 천막 안에 꽉 들어찬 포로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동생 「마틴」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바닷가로 다시 나갔을 때 최 총무는 갑자기 차를 멈추고 잠시 무엇을 생각하더니 혼자 가파른 언덕길을 기어 울라갔다.
내 올케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따라갔다. 한참 진흙탕 언덕길로 올라가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 올케가 『저분이 아마도 찾았나봐요』하고 소리쳤다.
소리나는 곳으로 가보니 올케는 큰 회색 바위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바위를 끌어안고 있었다. 내 동생의 비석이었다.
올케는 그 남편을, 나는 단 하나뿐인 남동생을 다시 한번 마음 아프게 추모했다.
필자 약력
▲북간도에서 출생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와 함께 한국으로 이사옴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
▲현 감리교 여 선교 연합회 협동총무
▲현 극단「가교」 연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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