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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동안 「쇠」생각만…"|포철을 낳아 기른 박태준 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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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포항종합제철이라면 먼저 생각나는 인물이 박태준사장(53)이다. 「오린지」색의「유니폼」에 하얀 철모·군화차림의 박사장은 포철의 산파이며 보모이기도 하다. 처음 기획때부터 참여, 4기 8백50만t 공사가 끝나기까지 13년동안 선두에 서서 포철을 이끈 기관차라 할수 있다. 4기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철에 온 전두환대통령도 『사자가 이끄는 양떼가 양이 이끄는 사자떼를 이긴다』는 서양격언을 인용하며 박사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칭찬했다. 4기공사준공식을 맞아 남다른 감회일수밖에 없다.
-포철의 종합준공을 축하드립니다.처음 포철을 맡게된 동기부터….
『대한중석사장때 해외나가면 공장구경하는 취미가 있었지요. 그 때문에 외국제철소도 많이 보았고 그것을 고 박대통령께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그 후 어느날 대통령께서 철에 관해 공부 좀 하라는 거예요. 구두발령인 셈이었지요.』
「와세다」대학예과 시절에 기계공학을 공부한 것이 참작이 됐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포철의 초창기엔 어려움도 많았다지요?
『포철설립 (68년4월1일)이전부터 난산아니었습니까. 자유당말기 20만t 계획에서부터 5·16이후 부정축재환수금에 의한 제철소건설계획, 그 후 상공부계획, 62년의 DKG 「그룹」(서독의 Demag Krupp Ghh사로구성) 에 의한 건설계획 등 네차례에 걸친 계획의 좌절은 그만두고라도 66년 KISA (대한국제제철차관단=미·영·불·독·이 등 5개국의 8개사로 구성)발족 이후 세은 (IBRD)·미수출입은행 (EXlM)과 IECOK (대한경제협의체)가 『한국의 제철소 건설은『타당성이 없다』고 판정, 69년 「파리」에서 열린 IECOK 연차총회에서 KISA회원국들이 차관제공에 난색을 표명하고 KISA와의 개약이 해지되고 말았지요. 정말 난감했습니다. 결국 대일청구권자금사용방안에 눈을 돌려 성공하게 됐지요.』
기술면에서의 애로는 상상하면 알수 있을 것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당시 포철계획관계자 40여명중 용광로를 본 사람이 박사장을 포함, 겨우 서너사람밖에 안되었다 한다.
-눈물을 홀리신 적도 있었다지요.
『제1고로화입식을 거행(73년6월8일)후 포철 전사원들은 과연 쇳물이 쏟아wu나올까 가슴을 죄었습니다. 화입 다음날인 아침7시30분 출구는 뚫리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산의 용암처럼 새빨간 쇳물이 콸콸 쏟아져서 나왔습니다. 지켜보던 사원들 모두가 서로 부둥켜안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홀렸지요.』
-국가적 숙원사업을 성취하기까지 박사장의 신조랄까 좌우명같은것은….
『국영이든 민영이든 큰 공장을 지을때는 정치와 관련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신조로 삼았습니다. 특히 개도국에서 정치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정치와 관련지으면 투자효율이 저하되고 따라서 경쟁력있는 기업을 만들수 없습니다. 최고경영자는 사방으로부터의 압력을 이겨나가자면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포철성공요인을 분석한다면?
『우리국민의 의식구조는 솔선수범과 상경하대의 유교적전통에 뿌리가 있다고 봅니다. 1만5천여 전사원이 일치단결하여 화합을 이룬 저력이 컸어요.
거기다가 정부지원과 국민의 성윈이 힘이 되었습니다. 특히 창업「멤버」들이 백의종군하는 기분으로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않고 뛰었지요. 경제적측면에서 보면 짧은 건설기간에효율적인 건설공사, 그리고 빠른 정상조업이 관건이었지요.』
-박사장의 희생에 가까운 헌신도 덧붙여야되겠지요.
박사장은 1남4녀의 아버지. 포철사장취임 때 국교생이던 장녀가 작년에 출가를 했다.
이 장녀가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한통의 펀지를 띄웠다.
『국민학교 5학년때부터 아빠와 떨어져 살아온 제가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조만간 독립된 생활을 하게되었지만 과연 아빠가 저의 성장과정과 인격형성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돌이켜보면 아쉽다』는 것이 편지의 요지였다. 朴사장은 이편지를 받고 가장으로서 후회도 된다고 실토한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포철의 초기 건설단계에는 한달에 한두번 서울집에 오기가 어려웠다한다.
『10년이상 혼자 지내며 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지요. 현장에서 밤늦게 숙소로 들아와 허전한 것은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지만 산업사회에서 이산가족으로 따지자면 나혼자뿐이겠습니까.』
사원들은 박사장을 「효자사주지」라 부른다. 포철주택단지가 효자동에 있는데 박사장이 거기서 주지같이 혼자산다는 것이다.
박사장은 이산가족의 체험으로 포철사원들의 주택문제는 거의 완벽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다.
-국영기업이라면 으례 적자가 나는 것으로 인식했었는데 포철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신 셈이 아닙니까.
『최소의 경비로 최대회사의 건설을 하겠다는 욕심이었지요. 일반사원은 경쟁시험으로 채용한 외에 단 한건의 인사청탁을 들어준 일이 없습니다. 회사가 지방에 있으니까 의·식·주에 관해 「인센티브」를 주어 사원들의 이탈을 막았습니다.
일본의 지가제도에서「힌트」를 얻어 택지를 무이자연불로 구입시켜 건축비50%자기부담에 50%회사보증융자를 알선, 개인이 한달에 1만5천원정도만 부담하면 각자 집을 마련할 수있도록 했습니다.
모두 포항을 제2고향으로까지 생각할 정도가 됐지요.』
-앞으로 박사장 개인 계획이나 하고픈 일이 있으시다면….
『계속 철강일을 하고 싶습니다.』지극히 명확하고 간단한 대답이다. <김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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