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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8)제72화 비규격의 떠돌이 인생(3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친구들과 신흥사에>
1933년 이른 봄, 암파문고가 나오기를 기다려 나는 부랴부랴 서울로 돌아왔다.
몇 해만에 동경서 돌아온 나를 친구들이 맞아주면서 절 밥 먹으러 가자고 돈암동에 있는 신흥사로 데리고 갔다.
밥상이 들어올 동안을 기다리면서 일행 4∼5명은 바둑을 두고 잡담들을 나누고 하는 곁에서 나는 절 마당에서 노는 어린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겨우 학교에 갈락말락한 어린놈들이 서너너덧, 일본말로 노래를 부르면서 공놀이를 하고있었다. 『사이죠오상와 기리 후까시 찌꾸마노 가와와 나미 다까시….』 일본 아이들이 공놀이 할 때 부르는 「데마리우마」(수구패)이다.
나는 뜰로 내려가서 노래를 부르던 아이 하나를 보고 물었다.
『「사이죠오상」이 뭐지?』
어린 소녀 대답은 역시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사이죠오상」이라는 사람 이름이지 뭐예요.』 「사이죠오사이(서조산)은 일본「신에쯔」(신월)지방의 산 이름이요, 「찌꾸마느가와」(천곡천)도 이 역시 「신슈후」(신주), 「시나노가와」(신농천)의 지류로 「우에다」(상전)분지를 흐르는 이름난 강이다. 일본 아이라면 아무리 두메산골의 아이라도 사람 이름으로 알고 이 노래를 부르지는 않는다.
예기치 않은 어떤 우연한 기록이 한 사람의 인생항로를 바꿔버린다는 그런 얘기를 흔히 듣는다. 비뚤어진 정서생활 속에서 절름발이로 자라나는 내 향토의 어린이들-, 그들에게 나를 붙들어 맨 기록은 실로 「신흥사의 절 밥」그것이었다
조상의 말, 어머니의 말을 맘대로 쓰지 못하고, 의미도 모르는 남의 말로 노래를 불러야하는 어린이들, 정치적으로는 설령 그들의 지배하에 있다 하더라도 하늘이 준 동심의 천진이 이렇게 짓밟혀야 한단 말인가?
그 해 정월에 나온 암파문고 「조선 동요선」의 첫 머리에 나는 『내 향토의 어린 벗들에게』라고 부제를 붙인 진 서문을 했다.
『-그대들과 향국을 같이 해서 태어났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우연이냐? 아니, 그것은 우연일 수 없다. 수학이 1에서 시작되듯, 그대들과 나와의 맺음은 전통의 첫 단위에서부터 시작이다. 그대들이 호흡하는 숨결, 그것은 바로 내 숨결이 아니더냐? 그대들의 눈물로 일그러진 얼굴, 그것이 바로 내 얼굴이 아니더냐? 그대들의 동경, 그대들의 환상, 그대들의 환호, 그대들의 의욕, 그대들의 전신에 뛰노는 붉은 핏줄기까지 통틀어서 그것이 모두 내 것과 하나로구나! 어느 누가 감히 이 굳은 맺음, 굳은 약속을 저해하고 가로막을 것이냐!
이 「약속」은 그러나 그대들 서로 서로의 약속이기도 하다. 커다란 그물(망)매듭이 한 가닥으로 연했듯이 그대들은 천으로 만으로 서로 얽히고 이어진 「하나」이다. 그 하나의 마음이 그대들의 노래」를 낳았고, 그대들의 정신을 이룩했다….』
10전 백동대 하나를 구멍에 넣으면 「가스·스토브」에 불이 댕겨지는 동경「히가시나까노」(동중야)의 싸늘한 「아파트」방에서 눈시울을 적시면서 이 서문을 쓰던 날 밤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내 조국, 내 향토를 사랑하면서도 자랑한다」는 그 한마디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하던 시절, 억눌린 격정, 사무친 그리움이 내게 이런 글을 쓰게 했다.
그 뒤 13년이지나 부산에서 해방을 맞은 이듬해 얘기지만, 동래읍 산기슭에서 원예일년생 노릇을 하고 있을 무렵「특색」을 짊어진 웬 청년 하나가 찾아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인사 한마디 없이 일문으로 써진 이 「조선동요선」의 서문을 경을 읽듯 줄줄 외우다가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룩색」의 청년이 『강아지 풀』의 시인 박룡래군이었다.
박 군은 본시 눈물이 많은 시인이었지만, 내가 그 서문을 썼을 때는 겨우 7, 8세의 소년이던 그가 해방이 되자 기다리기나 한 듯이 성장한 청년의 모습으로 동래까지 나를 찾아와 가슴에 간직했던 가장 진실된 언어로 그 서문에 대답해준 것이다.
그 뒤 30여 년 동안 나는 박 군을 대 여섯 번밖에 못 만났지만 지난해 11월, 잠시 동경으로 여행하고 없는 새 박 군은 고향인 대전에서 56세의 길지 않은 생애를 마쳤다.
증류수같이 팃기 없는 맑고 고운 일생이었다.
다시 「신흥사 절밥」으로 돌아간다. 총독 정치의 제물이 된 내 향토의 일그러진 동심-, 그 동심 위에 어떻게 하면 한 방울의 「모빌·오일」(윤골유)을 깃들일 수 있을까-.
신흥사의 뜰에서 의미도 모르고 「일본 노래」를 부르던 어린 소녀들의 모습이 그 뒤 여러 날을 두고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구전민요에 대한 네 권의 저역서-, 그 중에는 7백「페이지」의 원본이 있고, 권위를 자랑하는 암파문고 두 권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발판으로 해서 일본에서 문명을 높일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조선민요에 관해서는 두 번 다시 손을 대지 않겠다고 네 번 째 마지막 책에 「제언」까지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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