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문학상 본심 후보작 ⑥ 시 - 이수명 '이렇게' 외 21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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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머리통들이 횡으로 종으로 늘어서 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네가 잘 보이지 않는구나 내 앞에는 누군가의 머리통이 커다란 머리통이 있고 그 머리통 앞에는 또 다른 머리통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머리통 앞에는 또 또 다른 머리통이 있다. 머리통 앞에 머리통이 머리통의 머리통이 잇달아 있다. 보란 듯이 있다. 도대체 태연하게 있다. 네가 잘 보이지 않는구나 내가 너를 얼핏 볼 수 있는 것은 머리통들의 각도에 달려 있다. 앞의 머리통과 뒤의 머리통과 그 사이 머리통들의 각도가 미세하게 열릴 때 네가 찰나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각도는 다시 굳게 닫힌다. 다시 나는 시커먼 머리통과 머리통 속에 있다. 아직도 쏟아져 있는 머리통들과 함께 흘러다니는 머리통을 주워 이렇게 문득 세워놓는 자들과 함께 텅 빈 머리통을 이렇게

◆이수명=1965년 서울 출생. 94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마치』 등. 시론집 『횡단』. 현대시작품상·노작문학상 수상.


이수명(49)의 시가 어렵다면 그것은 그의 시가 ‘시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첨단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수명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수명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게 마련인 세계의 현상을 포착해 시로 쓴다. 그에게 관찰력의 비결을 묻자 “그저 보이는 것을 볼 뿐”이라며 “오히려 생각이 끼어들기 때문에 못 보는 것이 많은데, 정말 눈에 보이는 대로 쓸 수 있다면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일단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보기의 ‘이렇게’란 시다. 먼저 눈을 감고 사람들이 꽉 들어찬 광장을 상상하자. ‘머리통들이 횡으로 종으로 늘어서 있다.’ 당신은 여기서 애인을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눈 앞에 사람들이 가로 막고 있어 도통 애인이 보이지 않는다. ‘너를 얼핏 볼 수 있는 것은 머리통들의 각도에 달려 있다.’ 사람들의 머리통이 움직이자 저 멀리 애인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빽빽한 군중, 새카만 머리통들의 향연, 그 사이 나와 애인의(혹은 세계의) 우연한 조우.

 그래서 이 시의 주제가 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틀렸다. 애초에 주제는 없다. 질문만이 있을 뿐이다.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은, 머리통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떤 우연으로 우린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만난 것일까. 세계는 어떤 운명으로 이렇게 배치되어 있는 것일까.

 “최근의 관심사는 ‘배치의 문제’에요. 아주 순간적이고 우연적인 배치들이 이 세계를 채우고 있어요. 나라는 존재도 여기저기 배치되어 흩어져 있는 것에 불과하죠. 나란 본질은 없고, 엄마로, 며느리로, 선생으로, 행인으로 흩어져 있어요. 마치 나인 것처럼 살아갈 뿐이죠. 제 시가 이상하다고요? 세계의 배치가 더 이상하고 과도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본질은 없고 배치와 관계로 존재한다. 예심위원인 조재룡 문학평론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최근 이수명의 시는 한 문장, 한 문장 따로 읽어선 이해할 수가 없어요. 먼저 한 편을 쭉 읽고, 다시 문장과 단어로 돌아가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읽어야 해요. 전체 시스템 안에서만 말들이 의미를 갖는 거죠. 정체성의 시학에서 타자성의 시학으로 넘어갔어요. 이건 한국 문단의 사건입니다.”

 90년대 20대의 이수명은 난수표 같은 시를 들고 등장했고, 한동안 외로운 길을 걸었다. 2000년대 들어와 그의 영향을 받은 후배 시인들이 나타나면서 이수명 읽기도 활발히 진행됐다. 이젠 등단 21년차, 쉬엄쉬엄 갈 법도 한데 실험은 지독하게 계속된다. 그는 한국 문단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 세계는 정말 놀라워요. 언제나 느껴요. 저희 집 앞에 양재천이 있어요. 산책을 하다 보면 가로등 불빛이 양재천 물에 떨어져서 반짝반짝하는데 눈물이 날 때가 있어요. 아, 정말 어떻게 내가 여기에 온 것일까. 내 옆으로 지나다니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어떻게 나뭇잎은 놀라운 배치로 내 앞에 떨어지는 것일까. 제 시는 이 세계의 배치와 접촉하는 방식인 거죠.”

 이쯤 되니 그가 시인으로 ‘배치’된 최초의 순간이 궁금해진다. 언제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냐고 물으니,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선생님이 생활기록부에 ‘생각이 깊고 짓기에 능하다’라고 적은 것이 있으나 뭔가를 쓴 건 훨씬 이전이다. 글을 깨친 시점이었을까. 시가 글보다 먼저였을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말했다. 언제나 쓰고 있었다고, 언제나 사랑하고 있었다고.

글=김효은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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