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뒷좌석에 앉은 일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한미정상회담」이 일본정부에 안겨준 충격은 조금 과장하면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만큼이나 컸던 것 같다. 스스로 「아시아」의 대표임을 자처해온 일본으로서는 미 「레이건」행정부의 첫 외교상대가 일본을 제치고 한국이 됐다는 것도 충격적인 일인데다 더우기 그처럼 중요한 외교교섭이 진행되는 것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그 「쇼크」가 얼마나 켰으리라는 것은 짐작할만 하다.
「스즈끼」수상은 『한국도 꽤 잘하는데…』라고 감탄과 경악을 나타내는 한편 참담한 패배감을 감추지 못했다는 뒷 얘기다.
일본 언론들은 정부의 정보가 어두운 것을 아프게 꼬집었고 외무성도 스스로 『극장의 맨 뒷좌석에 앉아있는 꼴이 됐다』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정계 일각에서는 한국에 기선을 빼앗긴 일본의 대미외교에 신랄한 비판이 일고 있다.
최근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선진국이 모두 손들어버린 제2차 석유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데다 구미자동차·철강시장의 석권, 「엔」대강세 등 경제력신장을 배경으로 외교 면에서도 한껏 콧대를 세워왔다. 특히 「아시아」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경제지원을 무기로 후견인 행세를 하고 대 서방관계에서도 「아시아」의 대표임을 자처, 발언권을 높이려 들고 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한국의 내정에 노골적인 간섭을 하는 것이나 역대수상이 취임하면 즉각 미국을 방문하던 관례를 깨고 「스즈끼」수상이 첫나들이로 동남아 순방 길을 택한 것 등은 모두 이같은 지나친 자신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일본은 『미국이 일본과 사전협의 없이 한국에 관한 중요문제를 결정할 수 있겠느냐』는 안이한 자기도취에 빠져 있다가 이번에 찬물을 맞은 셈이 됐다.
더우기 김대중 문제를 놓고 기고만장하게 떠들었던 일본이니만큼 대외적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됐다.
일본정부는 이같은 외교상의 패배를 어떻게든 만회해보려고 수상의 미국방문시기를 서둘러 앞당기려는 움직임을 보이는가 하면 지금까지 몰아붙여 오던 한국정부에 대해 전대통령의 방일을 타진하는 등 약삭빠른 태도변화를 보였다.
그러나 이같은 약삭빠른 움직임보다도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을 돌이켜보고 스스로의 분수를 깨닫는 것이 오히려 잃었던 신뢰를 되찾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신성순 동경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