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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4)제 72화 비관격의 떠돌이 인생-김소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절영도 소년단 해산령>
소남자란 월남의 지사가 중국으로 찾아와서 양계초 선생에게 월남의 비참과 지배자인 불국의 전영을 눈물로 호소하는 그런 내용의 책이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이 소남자인 양 비분을 느꼈다. 마치 내가「프랑스」의 채찍아래 피를 홀리며 신음하는 것 같은 그런 아픔에 가슴이 떨렸다.
침략이 무엇이며, 민족의 자유란 어떤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가장 절실히, 가장 구체적으로 내게 가르쳐준 것이 이 얇다란『월남 망국사』였다. 그 속에 있는「월남」이란 글자를 무의식중에 내나라 이름으로 바꾸어서 읽을 수 있었다. 예술의「메카」인「프랑스」-. 「베를린」,「보들레르」를 낳은 그런「프랑스」인데도「월남인」에게는 지옥의 사자같은 무서운 침략자였다. 그야「프랑스」뿐이랴-, 강대국으로 일컫는 나라치고 남의 영토, 남의 민족을 겁탈하고 침략치 않은 나라가 과연 있었던가? 찬연한 문화를 지녔던「잉카」제국, 「애즈텍」왕국을 일순에 멸망시킨 것은「스페인」이요, 제 영토의 몇10배나 되는 식민지를 우려먹고 살 찐 것은 영국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우연히 읽은 책 한권은 마치「프랑스」하나가 침략의 원흉같은 인상을 내게 꽂아 넣었다.
재등총독이 오고, 강우규 의사가 그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고-, 무단 정책이 문치로 이름을 바꾸어 헌병대신 순사가 생기고-
하나밖에 없던 국문신문 「매일신보」에다 또 다른「동아일보」「조선일보」가 창간되고-.
그러던 이듬해 가을, 소년단에 해산령이 내렸다. 내가 배탈로 하루 결석한 날. 학교에서는 소년단원에게 한 시간 벌을 세우고 소년단원에서 나오지 않으면 퇴학시킨다고 위협을 했다는 것이다.
그전에도 순사가 다니면서 소년단의「포스터」를 떼어가고 소년단의 회장으로 예배당을 쓰지 말라고 한 일은 있었지만, 학교가 직접으로 이런 간섭을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경찰이 압력을 가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소년단의 해산이 그 신출나기 선생 탓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그것 저것을 가리도록 나는 철 난 처세 가는 아니었다.
내가 그것을 안 것은 소년단의 집합일인 일요일날 그 집합장소인 교회당에서다. 그 말을 듣자 바로 교회당 위에 있는 왕성학교로 뛰어갔다. 일직선생이「오르간」을 치고 있었다.
부임해 온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선생이다. 입술이 타고 혓바닥이 말라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흥분에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선생께 물었다.
『어째서 소년단원은 퇴학을 시키는 겁니까!』
선생은「오르간」애서 손을 떼고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내 표정이 험악했던지 아무 대답없이 다시「오르간」을 치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로 누가 시킨 일이냐고 거듭 물어도 여전히 대답이 없다.
마침내 나는 분통이 터져 버렸다.
『와 말을 몬하는 기요!』-부산 사투리로 한마디 절규하고는 눈 앞에 있는 화병을 내동댕이치고 직원실을 뛰쳐나왔다. 비오듯 쏟아지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면서-.
그날로 모교인 왕성학교와 결별을 지었다. 4년 졸업을 반년 앞두고-. 그 이후로 나는 일생토록 졸업장이란 것을 타 본적이단 한번도 없다.
선생 앞에다 화병을 내던진 것을 잘한 노릇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남 먼저 분노하는 자가 되리라』던 나 자신과의 공약을 나는 어른이 되기도 전에 제 모교에서 제1호로 실천에 옮겨 버렸다. 열세살 내기 단장의 발악이었다. 언제나 한복 바지춤에 한 손을 넣고 다니던 한문에 유식하던 김 선생, 작문시간에 써낸 내 글을 붓으로 크게 써서 몇 차례없이 교실에 붙여 주던 허 선생, 키가 작고 목이 짤막해서 풍채는 없으나 규율과 성실을 언제나 타이르던 일인 교사「요시따] (길전)선생-. 내게는 모두 고맙고 갸륵한 선생들이었다. 그 고마운 선생, 고마운 학교를 나는 이렇게 해서 하직했다.
하직한 것은 학교뿐이 아니다. 새벽부터 진종일 발동선이 퉁퉁거리던 나루터와도 작별이다. 입만 열면 천하가 왔다갔다하면서도 내일 먹을 끼니 주변도 옳게 못하는-, 「스파르타」식이라면서 내가 소금 양치질을 빼먹은 날. 모래알로 양치질을 시킨 그 삼촌과도 이제는 작별이다(그러나 어린 시절에 내 가슴에 민족 얼을 뿌리 깊게 심어준 것도 바로 이 삼촌이었다.)
마침 일본서 돌아와 있던 다섯 살 위인 종형이 다시 일본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나는 종형을 졸라서 일본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 물론 삼촌 몰래다.
종형이 석탄을 싣고 온 일본 배의 선원과 친했다. 그 선원이 사이에 들어서 종형과 나를 일본까지 실어다 줄 승낙을 선장에게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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