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향성 색맹-윤태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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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안과를 개업한 친구의 말대로 라면 나는 상당히 좋은 눈을 가지고있는 편이다. 종이 위에 감추어진 가지가지의 색들을 놓치지 않고 다 가려서 보니 색맹은 물론 아니요, 망막에 비친 사물이 흔들리거나 어지럽지 않으니 난시 역시 아니며, 아직까지는 안경을 쓰지 않아도 불편을 느끼지 않으니 근시나 원시도, 아니다.
게다가 시력은 좌·우 모두 20년째 1·2를 지키고 있으니 어지간히 밝고 건강한 눈을 가지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말로 나의 눈을 정상이라고 믿어도 좋을까?
얼마 전의 일이다. 모처럼 아내와 함께 외출에서 돌아오는 도중 어느 육교 위를 지나다 따분한 살림살이 이야기만 하는 아내를 윽박지르며 『이런 때쯤 되면 아무리 생활이 다급하더라도 옷 벗은 미류나무의 슬픔같은 것도 좀 생각할 줄 알아야지, 원 그렇게 감점이 메말라서야…』하고 으시댄 일이 있었다.
그랬더니 기막힌 표정으로 나를 보던 아내는『흥, 당신은 그래 기껏 미류나무의 슬픔은 보아도 발 밑에 엎드린 저 사람의 슬픔은 못 보는군요』하며 핀잔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할말이 없었다. 먼 곳에 있는 허황한 감상은 보아도 코끝에서 구걸하는 비참한 현실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야말로 이만저만한 원시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뒤 나는 몇 차례 스스로 나의 시력을 점검해 보게 되었고 그래서 얻은 결론이 아무래도 비정상 쪽으로 기우는 것 같아 시력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또 다른 내 친구의 말대로 모모한 모임에는 기꺼이 나가면서 동장들의 모임에 나가지 않는 것은 출세에 눈이 어두워 우정을 보지 못하는 탓이요, 반년이 지나도록 혼자 계시는 노모님께 문안 한번 드리지 않으면서도 매일 저녁 막내 녀석에게 줄 과자를 잊지 앉는 것 역시, 가지는 보아도 뿌리를 보지 못하는 일종의 편향성 색맹이거나 지독한 근시의 소치라 여겨지는 것이다.
그 뿐인가. 불혹이라 일컫는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변변한 철학하나 가지지 못하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허둥대고만 있으니 나야말로 인생과 시대와 역사를 보지 못하는 난시에 불과하다고 느껴진 것이다.
눈의 건강도만 해도 그렇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처럼 안질을 자주 앓았던 사람도 드물 것으로 생각된다. 어렸을 적 과자만 보면 눈이 충혈되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여학생의 곱게 흘러내린 가랑머리만 보아도 눈이 상혈되던 때도 있었고 돈에, 자리에, 그리고 그밖에 수없이 많은 것들이 나의 눈을 흉할 정도로 더럽혀 온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어떤 이는 이런 나를 두고 심안과 육안을 구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웃을지 모르나 몸과 마음을 나누어 사람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나의 눈은 아무래도 정상이라 보기엔 곤란한 점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나 아닌지. 다만 이런 때 새삼 생각나는 것은 30년대의 시인 이상이 왜 그 유명한 『오감도』에서 장자의「목대부도」란 말을 생각해 냈을까 하는 점이다. <시인·상명여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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