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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3)|제71화 경기80년(51)<제자=필자>-고교평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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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74년 문교부는 해방이후 최대 교육혁명으로 불리는 고교평준화를 단행했다. 고교평준화조치로 20세기 시각과 함께 관학으로 시작된 명문 경기는 법통이 끊긴 것이다.
경기는 중학교의 폐지에 이어 고교도 학군제에 의한 추첨으로 입학하게 됨으로써 명문고교로서의 의미를 잃었다.
당시 민관식 문교장관(33회)이나 나는 고교평준화로 동창들로부터 질책을 받아 호된 시련을 겪기도 했다. 75년9월18일에는 긴급조치가 발동 중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평준화와 교사의 영동이전을 반대하는 「데모」를 덕수궁 앞에서 벌여 이를 설득하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
경부의 도심지 인구분산책에 의해 경기는 72년에 이미 강남지방에 학교부지를 마련해 새 교사를 착공했다. 당시 서울시교육위원회에선 영등포구신림동에 2만여평을 잡아놓고 경기동창회에 다시 교지를 물색하라고 요청해왔다.
그래서 동창회장인 강성태(17회)를 비롯, 정구충(14회) 권순영(34회) 김선기(33회), 그리고 교장인 나를 포함한 교지물색 전임위원회가 72년1월 한달간의 고심 끝에 지금의 삼성동91번지에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는 앞에 봉원사가 있어 송림이 우거져있고 뒤에는 수도산이 우뚝 솟아 있는 명당자리다.
삼성동의 새 교사는 대지가 3만2천여평으로 화동의 구교사(1만1천여평)에 비해 거의 세배나 넓은데 동창회에서 기부한 5천만원 등 국고보조 10억원을 들여 4년만에 완공됐다. 76년2월20일 눈보라가 치던 날 나와 권성기 동창회장(26회)은 교기를 앞세우고 이삿짐을 새 교사로 옮겼다.
화동언덕을 떠나던 그 날은 평생 잊지 못할 가슴 뭉클한 순간으로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화동과 삼성동 교사자리엔 이전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는데 권성기(26회)가 글을 짓고 최세경(37회)이 비에 옮겨 썼다. 나는 새 교사로 옮긴지 3년만인 79년3월1일 서울시 교육위원회 부교육감(80년6월20일·서울교대학장으로 전임)으로 옮겼으며 제32대 교장엔 황철수 부교육감이 전임됐다.
지난8월엔 김인숙 교장이 황 교장의 뒤를 이어 제33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경기는 금년에 80주년을 맞았지만 동창들은 76년에 졸업한 72회까지를 정식동창으로 인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경기동창들은 마음의 고향으로 앞으로도 경기를 아껴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바람이다.
경기는 그동안 거의 1세기에 걸친 80년 동안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동안 경기졸업생으로 박사만 5백58명이 나왔으며 국회의원 62명, 장관38명이 배출됐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과도기이긴 하지만 최규하 대통령·이영섭 대법원장·민관식 국회의장직무대리 등 3부 요인이 모두 경기동창이었는데 특히 이들은 모두 33회 동기동창이어서 화제가 됐었다.
경기에 대한 학부형들의 동경심은 옛날부터 대단해 3대에 걸친 동창이 있는가하면 아들6형제를 모두 입학시킨 강한 학부형도 있다. 학교에선 개교 70주년과 80주년 기념식때 이들을 표창했다. 이중38회 동창인 임평기와 성균관관장을 지낸 권중해는 모두 6형제를 경기에 입학 시켰는데 특히 권중해는 안동에 살면서 아들들을 위해 학교근처인 소격동에 집을 새로 마련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경기는 옛 터전을 옮기고 명문으로서의 이름도 잃었지만 경기경신은 영원할 것이다. <끝> 【서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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