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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9)|제71화 경기80년(47)<제자=필자>-「5·16」후 군정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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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61년 5월16일 군사혁명이 발발하여 정권은 민주당 정부로부터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넘어갔다. 이 때부터 63년11월 제3공화국이 탄생될 때까지 군정이 실시되었다. 4·19의거 학생집단은 주체세력의 비 조직화·영도 체제의 불 확립·이념과 정책체계의 미비·학생집단의 한국 정치체제상의 위치 등으로 의거를 혁명으로 이끌지 못해 극심한 혼란기를 거쳐 결국 5·16군사혁명으로 역사의 방향을 몰고 간 것이다.
혁명정부의 문교정책은 인간개조라는 거대한 목표를 내세웠으며, 교육계는 어느 부문보다도 과감한 「메스」를 가했지만, 의욕의 과잉이 원인인지 군정이 끝나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부문이 많았다. 혁명정부는 세칭 일류학교의 폐단을 없앤다고 교원의 전국적인 인사교류를 시도했고, 교원의 세대교체를 위해 정년을 65세에서 60세로 내리기도 했다.
또 61년8월12일에는 중·고등학교 및 대학교의 입학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제정 공포하여 입학시험의 국가관리 제를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획기적인 정책은 의욕에 비해 성과가 적었다는 비판을 뒷날 받았고 오히려 부작용마저 생겨 입시의 국가관리 제는 63년에 폐지되었다.
중·고교에 있어 입시의 국가관리 제는 지원학교 선정을 시·도별로 제한하여 지방학교의 육성을 의도한 것이고, 체능검사에 비중을 더 둔 것은 보건교육에 자극을 주고자한 것이며, 고교입시는 동계진학에 특전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 아래 실시된 입시는 결국 학교 차를 공개, 조장했다는 평가를 받게된 것이다.
그리고 61년8월15일에는 「교육법 중 개정법률」이 공포되어 학년이 매년 3월1일에 시작해서 2월말로 끝나게 변경되었다. 인간개조를 목표로 한 혁명정부 문교시책에 따라 62년에 들어 경기는 이미 오래 전 논의해온 학생성품 점수 화 안을 매듭지어 4월1일부터 시행했다.
이것은 학업성적만을 점수로 표시해 온 불합리성을 시정하고자 학생생활 전반에 걸쳐 약50항목의 규정을 작성하여 불미한 사고의 예방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이 제목에는 예절·수업태도·무단결석·복장·시험 중 부정행위·풍기문란·파렴치행위 등 다양한 처신이 포함되어있다.
이같이 군정기간 중에는 조용한 가운데 모든 활동이 이루어져 학술토론대회(62년6월9일)등 학력을 기르기 위한 노력을 쌓아나갔으며 이해 7월31일에는 대의원총회 의장인 고3의 곽영훈(59회)이 한국학생을 대표해서 미국 가정방문, 지역 사회활동 회합에 참가하는 대외활동이 있었다. 그리고 63년5월엔 시험이외의 학습활동에도 능률을 올리기 위한 조치로 『평소 성적 점수제』가 채택되어 전 평가성적의 30%를 이것으로 충당하는 방안이 학교당국에 의해 마련되었다.
이 동안의 대외활동은 농촌계몽·수학경시·음악회·체육활동 등을 둘 수 있고, 과학관 건설을 위한 공사가 서서히 진행되었다.
63년7월3일 양재휘 교장이 경북고 교장으로 전임되고 덕수상고의 원흥균 교장이 제26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22회 동창인 원 교장은 부임후 학교의 경영목표를 학원의 「민주적 근대화」「과학화」「합리화」 등에 두고 학사행정에 있어서도 교무분장을 재편성했으며 학사지도 면에서는 정서교육과학지도 교육에 크게 주력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이해 10월5일 중등교육발상지의 석비를 세우고 조심대를 건립했으며 화동상과 응원가를 제정했다. 중등교육 발생지의 석비는 창립 40주년이 되던 일제 하 1940년에 건립됐으나 비문이 일본어였다는 이유로 없앤 것을 다시 건립한 것이다.
이 석비에는 『대한 광무4년 서기l960년10월3일, 나라에서 본교를 이 자리에 청설 하였으니 실로 우리중등교육의 획기적인 사실이며 관립으로 처음되는 일이다…』라는 비문을 전면에 함께 새겼다.
조심대는 영국제 거울로 학생들의 품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계속> 【서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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