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징용자가 판 갱도 안내판 … 흰 테이프로 '강제' 표현 가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3면

일본 나가노현의 마쓰시로(松代) 대본영 지하호 입구에 설치된 안내문 중 “조선인들이 노동자로서 강제적으로 동원돼…”란 부분의 ‘강제적으로’가 하얀 테이프로 가려져 있다. [김현기 특파원]
도쿄 도심 조시가야 공원묘지에 자리 잡은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의 묘. [김현기 특파원]

13일 오후 일본 도쿄에서 북서쪽으로 300㎞가량 떨어진 나가노(長野)현 마쓰시로마치(松代町). 30도를 넘는 무더위였지만 ‘마쓰시로 대본영(大本營) 조잔(象山) 갱도’ 안으로 들어가자 16도로 내려갔다.

견학 온 아이들의 입에서 “사무이(춥다)”란 말이 나왔다. 높이 2.7m, 폭 4m의 지하호는 세로 20m 간격의 20개 갱도와 가로 50m 간격의 4개 갱도가 교차하는 엄청난 규모다.

 이곳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최고사령부와 왕실·정부기관·NHK(공영방송)를 이전하기 위해 일대 야산 세 곳의 땅밑에 대규모 지하호를 만드는 ‘대본영 건설공사’가 이뤄진 곳이다. 사실상의 수도 이전이었다. 1944년 11월 11일 시작한 이 공사는 75%의 공정이 진행된 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함께 중단됐다. 당시 완성된 지하호의 총 길이는 10㎞. 이 중 519m만 90년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당시 공사에 동원된 1만 명 중 약 7000명은 조선인 노동자였다. 삽과 쇠꼬챙이로 갱도를 팠다. 지하호 곳곳에는 쇠꼬챙이 자국이 남아 있었고 천장에는 쇠꼬챙이가 꽂혀 있기도 했다. 현장에서 만난 한 고교생은 “조선인 노동자의 아픔이 상상된다”고 말했다.

 갱도 입구에서 400m가량 들어간 세로 11번 갱도 암반에는 ‘大邱(대구)’ ‘大邱府(대구부)’란 낙서가 새겨져 있었다. ‘마쓰시로 대본영 보존을 추진하는 모임’의 기타하라 다카코(北原高子) 사무국장은 “조선인 노동자가 고향을 그리며 글자를 판 것으로 보인다”며 “대구에 부(府)를 단 것은 식민지 시대 당시 조선총독부가 대구에 ‘부’란 일본식 호칭을 달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바로 옆에는 조선인의 얼굴을 그린 낙서도 발견됐다. 세로 12번 갱도 쪽에선 당시 노동자들이 손으로 밀던 자재 운반용 손수레의 레일 흔적이 남아 있었다.

 군국주의를 반성하는 상징적 시설물로 공개돼 온 이곳 마쓰시로 대본영에 최근 변화가 있었다. 나가노시가 90년 지하호 입구에 설치한 안내문 중 “조선인들이 노동자로서 강제적으로 동원돼…”의 ‘강제적으로’ 부분을 하얀 테이프를 붙여 가린 것이다. 그러곤 안내문 옆에 “전원이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견해가 있어 그렇다”는 별도의 사유문을 달았다. “위안부의 강제 연행을 입증할 문서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논리가 마쓰시로 대본영 현장에도 번진 것이다. ‘마쓰시로 대본영 보존을 추진하는 모임’의 메자와 다미오(目澤民雄) 회장은 “가소로울 정도로 졸렬한 행위”라며 “이제까지 멀쩡히 있다 ‘강제적으로’란 표현을 지운 건 고위 인사가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테이프 하나로 ‘역사 지우기’에 나서는가 하면 굴욕의 역사를 명예의 역사로 둔갑시킨 현장도 있다. 도쿄 도심 이케부쿠로(池袋) 인근 조시가야(<96D1>司ヶ谷) 공원 묘지. 11만5700㎡(3만5000평) 면적의 묘역 한가운데 태평양전쟁 당시 총리로서 국제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 판정을 받아 교수형에 처해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묘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도 한복판에 전범의 묘를 만든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일이다.

 묘를 둘러보니 높이는 약 4m, 폭 3m로 인근의 다른 묘보다 3~4배가량 컸다. 묘석의 재질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묘 앞에는 방금 헌화한 듯한 꽃들이 화병에 꽂혀 있었고 큰 술병도 놓여 있었다.

마쓰시로(나가노현)·도쿄=김현기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