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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5>|제71화 경기 80년(43)|<제자=필자> 서장석|환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53년7월27일 「유엔」군과 북괴 사이에 휴전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3년간을 끌어온 민족적 대비극이었던 6·25 전쟁은 일단 종지부를 찍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임시 수도 부산에서는 피난살이를 청산하고 환도, 복귀하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부산에 임시교를 열고 있던 각급 학교들은 모두 서울 복귀를 서두르게 됐다.
각 대학에서는 학장 회의를 소집, 새 학기 개강을 서울 본교에서 하기로 결의했으며, 이에 따라 각 중·고도 함께 들먹거리게 됐다.
그러자 서울시 교육국에서는 아직은 서울이 평정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니 부산 소재의 서울 학교들은 대폭적인 서울 복귀를 삼가라는 공문을 보내왔다.
당시 서울은 비록 전쟁은 끝났다해도 모든 것이 아직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혼란 상태였는데, 특히 각급 학교의 경우는 군부대가 작전상 이유에서 대부분의 학교 건물을 사용하고 있어서, 부산의 임시 학교가 서울로 복귀한다해도 정작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이 없는 형편이었다.
경기의 경우는 화동 본교사가 미군 통신 부대에 징발, 사용되고 있었는데 교장실과 직원 회의실은 「모터·풀」로 완전 개조돼 있었고, 넓은 운동장에는 각종 군 차량, 그리고 국기 게양대에는 성조기가 펄럭이는 등 완전히 미군부대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이들로부터 당장에 교사를 돌려 받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앞서도 얘기한 것처럼 당시 경기의 서울 분교는 51년6월 보인상업 교사에서 개교, 이듬해 6월엔 덕수 국민학교 교사로 옮겨서 그 일부를 빌어 쓰고 있었는데, 맹 교장 이하 교직원들은 그래도 피난살이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서울에 돌아 가는 것이 났다고 판단, 부산 분교가 서울 분교 들어가는 형식으로 서울 복귀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에 앞서서 그해 8월부터 부산에는 환도 바람이 세차게 불어 각 공공기관과 학교들 그리고 일반 국민들은 복귀를 더욱 서둘렀는데 경기 학생들 가운데도 서울 복귀 증명서를 떼어 가는 학생들이 나날이 늘어갔다.
이런 현상은 특히 8월 중순에 들면서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는데, 여름방학 전에는 서울복귀 학생이 매일 5∼6명 정도이던 것이 30∼40명 선까지 부쩍 늘어나게 됐다.
53년10월3일, 개교 53년을 맞은 뜻 깊은 날에 역사적인 서울·부산 분교의 통합 개교식이 서울 정동 덕수 국민학교 가교사에서 있었다. 함석과 가마니로 이은 지붕, 깨진 유리창 투성이의 창문·판자로 조각조각 이은 교사에 운동장도 없는 초라한 곁방살이 신세였지만, 교직원과 학생들은 실로 3년만에 갖는 한자리였고 그야말로 눈물겨운 재회였다.
서울·부산 두곳의 분교가 통합 개교한지 약 6개월이 지난 54년4월 고등학교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의 공터에 지은 천막 가교사로 이전했다. 덕수 국민학교의 가교사로는 도저히 전 학생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종로 천막 가교사에서는 웃지 못 할 희극들이 가끔 연출되곤 했는데, 54년 초가을 어느날인가는 고3학생들이 월말 시험을 보던 중 인왕산 너머에서 갑자기 불어온 돌풍이 천막 교사를 뒤엎어 지붕이 날아가는 바람에 시험지가 사방으로 흩어져서 시험이 중단됨은 물론, 시험을 보던 학생들은 시험 보는 일은 제쳐두고 부랴부랴 교사 복구 (?)에 나서야하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참으로 절박한 일이었다.
중학교가 들어가 있던 덕수 가교사도 마찬가지 여서, 교실마다에는 옛날 막걸리 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기다란 책상과 걸상에 1백40∼50명의 학생이 우글거려야 했고, 운동장 또한 주인인 국민학생들에게 독점 당해 체육시간은 주로 실내 수업으로 채워야 했으며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도 학생들은 기껏해야 교정 한구석의 방공호 속을 드나들며 숨바꼭질이나 하는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무슨 행사가 있을 때면 길 건너 경기여고의 강당이나 덕수궁 뜰 그리고 배재고 운동장을 빌어 써야만 하는 궁핍한 생활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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