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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편 최대한 확보가 핵심 … 중견국 외교로 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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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난달 3일 청와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공동기자회견 때 미국 정부 관계자들이 관심 있게 지켜본 것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대한 언급이었다. 미국은 중국이 주도하는 AIIB에 가입하려는 한국에 대해 이미 우려를 표명했었다. 박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아시아 경제 발전을 위한 인프라 확대 필요성에는 “공감한다”, 중국의 AIIB 제안엔 “높이 평가한다”고 표현했다. 미·중을 모두 배려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를 두고 중국 외교부 당국자는 한국 학계 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중·한 관계는 ‘튀긴 아이스크림’ 같다. 겉은 뜨겁지만, 한 입만 베어 물면 속은 차갑다.”

 #2010년 12월 노벨평화상 시상식을 앞두고 정부는 고민에 빠졌다. 중국의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가 수상자로 선정되자 중국 정부가 각국에 시상식에 참석하지 말라고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동맹국들에 참석을 강하게 권했다. 결국 우리나라는 관례대로 주노르웨이 대사가 참석했지만, 직전까지 내부적으로 “대사보다 하나 급을 낮춰야 하는 것 아니냐”는 안을 심각하게 검토했다. 한 전문가는 “인권은 한국이 수호하는 가치 중 하나이므로 중국에도 ‘이건 우리의 원칙이고 가치’라고 강하게 설명했어야 한다.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아쉬워했다.

 이 두 사례는 국익보다 강대국을 중심에 둔 관행적 사고로 갈팡질팡하는 한국 외교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한국과 같은 중견국은 강대국에 의존할 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내 편’을 최대한 확보하는 파트너십 구축을 핵심 외교전략으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국익의 정의와 우선순위를 새로 설정하는 일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한석희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지금은 미·중 사이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기보다 문을 걸어 잠그고 우리의 국익을 다시 고민해야 할 때”라며 “이렇게 국익의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대외적으로 선언해 놓아야 강대국들이 충돌할 때도 자신감 있게 대응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 2차관을 지낸 김성한 고려대 교수도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계 편입 문제 같은 경우도 우린 이게 정말로 북핵과 미사일 도발 억지에 도움이 되는지만 판단하면 된다”며 “여기서 미·중 변수를 너무 고려해 버리면 덫에 빠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주변국들은 우리와 체급이 다른 강대국이란 점을 염두에 두고 ‘외교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패권을 경험해본 강대국들은 언제든 상대에게 비합리적인 요구나 압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종철 국방대 안보대학원 교수는 “우리 외교에 미·중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와 상황이 비슷한 제3의 행위자들과 손잡으면 외교적 자립성을 높일 수 있고, 미·중이 우리에게 강압적 요구를 하기도 어려워진다”고 주장했다. 중견국 외교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청와대 기획관을 지낸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는 “단순히 덩치가 비슷한 국가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식의 중견국 외교가 아니라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는 분야를 선점해 지지와 공감을 이끌어내며 외교적 활동 공간을 넓혀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녹색성장과 기후변화 ▶G20 서울 정상회의와 부산 개발원조총회를 통해 부각된 개발협력 분야 등을 예로 들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멕시코·인도네시아·터키·호주로 구성된 믹타(MIKTA)도 한 모델이다. 믹타는 최초의 중견국 협의체다. 한국이 주도해 지난해 만들어진 믹타는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말레이시아 여객기 격추 사건 등 국제 현안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향후 1~2년 사이 믹타가 지향하는 비전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것”이라며 “벌써 가입을 원하는 국가가 있을 정도로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정권 교체 때마다 외교전략이 바뀌는, ‘5년마다 새로 시작하는 외교’도 문제다.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전문가 집단이 있어야 하고, 이들이 균형추나 견제자 역할을 하며 정부에 자문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치 지도자들은 긴 맥락을 놓치지 않고, 국내정치 상황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며 “상대국 지도자들과도 끊임없이, 냉정하게 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견국 외교=강대국은 아니지만 국제사회 주요 이슈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중견국(Middle power)이 역량과 의지를 바탕으로 펼치는 외교. 새로운 국제 질서를 창출하고 국제사회 갈등 중재 역할, 선진국·개도국의 가교역할을 추구한다. 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 호주 등 중견국가들 간의 모임인 ‘MIKTA’도 중견국 외교의 대표적 예다.

◆특별취재팀=유지혜·유성운·정원엽 기자, 베이징·도쿄·워싱턴=최형규·김현기·채병건 특파원, 권정연·차준호 대학생 인턴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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