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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목요일] 필리핀서 모기 한 방 … 뎅기열에 날아간 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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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필리핀 마닐라로 5월에 휴가를 떠난 박모(31·울산시)씨. 여행 둘째 날부터 몸에서 이상신호가 감지됐다. 새벽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오한(惡寒)이 찾아왔다. 여행의 피로이겠거니 생각했다. 긴 바지와 점퍼를 입고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증상이 악화되면서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다리에 힘이 빠졌다. 날이 밝자마자 현지 병원을 찾은 박씨는 뎅기열 진단을 받았다. 뎅기 바이러스에 감염된 모기에게 물린 것이다. 휴가 떠나온 들뜬 마음 탓에 아열대지역의 모기에게 물린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화근이었다. 박씨는 4일간 하루 3통씩 수액을 맞았다. 그는 “여행지가 도시라서 전염병에 걸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모처럼의 휴가를 병원 신세만 지다 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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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볼라 출혈열이 유행함에 따라 각종 감염병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감염병에는 치사율(20~90%) 높은 에볼라만 있는 건 아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같은 치명적인 질병부터 뎅기열 같은 비교적 가벼운 질병까지 다양한 감염병이 유행 중이다.

 해외 여행이 늘고 글로벌화로 인적 교류가 급증하면서 지구촌 각지의 감염병이 국내에 유입되고 있다. 해외 여행객이 현지에서 감염병에 걸린 뒤 국내에 들어와 주변에 병을 퍼뜨리는 경우가 특히 많다.

 13일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2010년 334건이던 해외 유입 감염병이 지난해엔 494건으로 50% 증가했다. 올해는 6월까지 이미 165건이 확인됐다. 보건 당국은 여름휴가가 집중된 7~9월에 더 많은 환자가 발생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지난해 해외 유입 감염병을 살펴보면 다행히 치사율이 높은 질병은 드물었다. 가장 많이 걸린 감염병이 뎅기열이었다. 전체 감염병의 절반 정도(51%)를 차지했다. 뎅기열은 일주일 정도면 회복된다. 치사율은 1% 미만이다. 하지만 드물게 배에 물이 차거나 출혈이 생기는 뎅기 출혈열로 진행되기도 한다. 이 경우 치사율은 20% 선으로 높아진다.

 질병관리본부 김영택 감염병관리과장은 “발병률이 높은 뎅기열이 치사율도 높았다면 인류에게 가장 위협적인 감염병이 됐을 것”이라며 “뎅기열이 유행하는 아열대지방은 백신 개발 기술이 낮고, 치사율이 낮아 백신 개발이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뎅기열은 예방 백신이 없어 모기에게 물리지 않는 것이 유일한 예방법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매년 5000만~1억 명 정도가 감염된다. 뎅기열 다음으로 많이 유입된 감염병은 세균성 이질(13%)·말라리아(12%)다. 이들 세 가지 질병이 전체의 약 80%를 차지했다. 세균성 이질은 설사·식욕 부진 등 배탈 증상과 비슷하다. 시겔라균 보균자의 분변이 손에 묻거나 파리·바퀴 등이 음식물에 옮겨 감염된다. 항상 손을 깨끗이 씻고 여행지에서 길거리음식을 먹지 않아야 한다. 말라리아는 모기에게 붙어 있는 말라리아 원충이 사람에게 전파돼 걸린다.

 치사율이 낮은 감염병이 더 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부 학계에서는 이를 진화의학 또는 다윈의학(진화의 관점에서 질병의 원인을 분석하고 치유법을 찾는 의학)으로 설명한다.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는 기생하는 사람이나 동물 등 숙주(宿主)를 죽여 자신도 죽어버리고 만다. 결국 세대를 거듭해 살아남은 바이러스와 사람이 서로 생존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대병원 오명돈 감염내과 교수는 “진화의학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라며 “열대성 말라리아는 전파가 잘되면서 치사율(40%)도 높다”고 지적했다.

 또 치사율이 낮다고 마냥 우습게 볼 순 없다. 가족·이웃에게 병을 나눠주는 민폐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후진국형 감염병으로 알려진 홍역이다. 홍역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되는 홍역은 환자와 직접 접촉이나 기침, 오염된 물건 등을 통해 광범위한 전파가 가능하다.

 실제로 사라진 줄 알았던 홍역은 최근 다시 기세를 떨치고 있다. 올 들어 7월 중순까지 발생한 홍역 환자만 410명. 지난해 연간 발생한 환자(107명)의 네 배에 육박했다. 최근 홍역이 유행한 중국·베트남·필리핀 등지에서 옮겨왔다. 전체 환자의 90%(366명)가 해외파 환자였다. 14명은 해외 여행에서 홍역에 걸렸다. 352명은 해외 감염자로부터 2차 감염됐다. 5월엔 국민대·광운대 등 학생 11명이 집단 감염된 사례도 있었다.

 대한감염학회 김우주(고려대 의대) 이사장은 “홍역 환자 한 사람이 15명까지 감염시킬 수도 있다”면서 “해외 감염을 통한 국내 2, 3차 감염이 늘면 사라졌던 홍역이 다시 토착화할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성인이라도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하는 게 좋다”고 덧붙였다.

 감염병을 막는 최선책은 예방접종이다. 하지만 사람이 걸릴 수 있는 감염병은 800여 개이지만 백신은 25종에 불과하다. 결국 감염경로를 파악한 뒤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특히 해외 여행 때는 더 조심해야 한다. 말라리아 유행지역을 갈 때는 출발 1∼2주 전 예방약을 먹어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MERS 발생 지역에선 특히 낙타와의 접촉을 피하고 익히지 않은 낙타고기·낙타젖을 먹지 않는 게 좋다. 아프리카에서 흔한 황열은 여행 출발 10일 전 예방접종을 하는 게 좋다. 콜레라·장티푸스·B형간염도 유행지역에 가기 전 예방접종을 하는 게 안전하다. 귀국한 뒤에는 잠복기를 감안해 발열·설사 증상이 없는지 체크하는 것이 좋다.

장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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