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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3) 경기 80년-제71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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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40년 경기는 개교 4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이때는 전시 중이라서 매우 조촐한 기념행사를 가졌고, 그 기간도 크게 단축, 단 하루뿐이었다.
정작 기념식은 개교기념일보다 약 한달 뒤인 11월 1일에 거행됐는데, 이 자리에서 「중학교육발상지지」와 「실질강건」이라는 2기의 비가 제막됐다.
「중학교육발상지지」의 비에 대해서는 일반에서 약간의 물의가 있었는데, 고작 40년 역사밖에 안된 경기가 어째서 「발상」이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한말 관립중학교령에 의해 정식으로 세워진 학교로서는 경기가 처음이었으므로 이를 두고 일어난 물의는 결국엔 수습됐다.
기념식에 앞서 10월 31일엔 새 교사를 세우는데 공이 켰던 전임「와다」(화전)교장을 일본「도오꾜」로부터 특별히 초대,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고 기념품을 증정했다.
또 관립중학교 및 한성고등학교시대의 역대 교장인 김각현, 이필균, 민영오, 이달용, 이원용, 홍석현, 여섯 교장의 사진을 액자에 넣어 교내에 걸게 하고 당시 생존해 있던 전임 교장들을 기념식에 초대했다.
기념식이 끝난 뒤엔 교육전시회가 열렸는데, 학예회·집단체조·검도·기계체조·모형비행기 날리기·「글라이더」훈련·분열행진·전투훈련 등을 학부형과 일반에게 관람시켰다.
개교 40주년을 맞이할 무렵의 경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크게 변모하고 있었다.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바꿔놓으려는 일제의 교육정책에 따라 당시 한국인학교는 모두가 같은 운명을 겪었지만, 특히 경기는 한국인 학교중 가장 대표적 학교였기 때문에 당국으로부터 소위 황도교육의 이념이 가장 철저히 구현돼야할 학교로 인식됨으로써 특별히 주목을 받고 있었다.
당시 일제는 우리 나라 교육의 3대 강령으로 국체명징·내선일체·인고단련을 내걸었는데 이러한 강령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한국인은 별의별 곤욕을 다 치러야 했다.
즉 일본의 국체를 터득해야한다는 소위 국체명징를 위해 항상 「황국신민의 서사」라는 것을 외워야 했을 뿐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면 천황이 사는 궁성을 향해 요배를 하도록 하며, 신사참배를 의무화시켰다.
이와 함께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국어상용과 창씨개명을 강요했으며, 일제가 벌이는 「성전」에 강건한 몸과 마음으로 참여하기 위해 역경을 참아 내는 인고단련을 요구했다.
이러한 강령을 실천하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는 학교였다. 당시 학생들은 학교에 가면 3대 강령의 근본정신이란 것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고 또 들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어상용이 가장 철저했는데, 원래 경기는 공립학교였기 때문에 평소 공식적으로는 일어가 많이 사용됐던 것은 사실이나 사적으로 일어를 사용하는 것은 교내에서도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교내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일체 일어만을 사용토록 했다.
학생들의 정서교육에 있어서도 「일본 것」이 널리 도입됐는데, 남관 한 구석에 일식 방을 꾸며「작법실」이라 부르고 일식 예의범절을 가르쳤다. 또 낭음이라 해서 일인이 만든 한시를 일식으로 읊는 법을 가르치고 권장했으며, 조회시간 같은 때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는 교장이 선두가 돼 함께 한시를 읊도록 했다.
이 시기엔 또 교련이 크게 강화됐는데 교내에 병기고를 세우고 간이 사격장을 마련, 사격훈련을 시켰으며 매주 1회 교련조회를 열어 분열행진을 연습시켰다.
교련과 더불어 검도도 강화됐는데 특히 검도는 일본식 무사도 정신을 수련시킨다 해서 더한층 강조됐다. 또 겨울방학 때는 동계특별훈련을 계획, 추위가 특히 심한 1월의 약 2주 동안 새벽에 등교케 해서 소위 내한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이 결과 기타의 운동부는 사실상 그 기능이 정지될 수밖에 없었는데 더욱이 학우회가 국민총력연맹으로 개편된 뒤부터는 구기부 활동은 거의 금지되고 사격부·검도부·승마부·「글라이더」부 등 「전기수련」을 주도하게 됐다.
이와 함께 기계체조와 수영이 강화됐는데 「이와무라」교장은 부임하자마자 철봉, 평행봉 등을 많이 만들어 이를 널리 이용토록 적극 권함으로써 기계체조의 명수들이 많이 나왔다.
수영에 있어서는 39년 하계방학부터 원산의 송도원에서 임해집단훈련을 시작, 41년까지 계속했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엔 임해훈련을 중단, 교내에 수영장을 만들어 수영을 가르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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