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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화 경기 80년 한일합방|식민지 오욕 시작, 울분으로 자퇴 늘어 민도에 맞춘다는 구실로 학제도 차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르 합방된 뒤 해방이 될때까지 우리민족은 30년간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통치를 받게된다.
합방은 곧 식민지시대 교육의 시작을 뜻했다.
합방이 발표되자 학교분위기는 달라졌다.
나이 많은 학생들 대부분이 『나라가 망했는데 공부는 더해서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반에서 비교적 나이가 많은편(16∼18세)이었던 김만원·김명직(제주도 출신·신천지잡지 주필)등 16명의 급우들이 그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래서 입학 당시 60명 학생이 졸업때는 43명으로 줄었다.
이후 커다란 변혁이 있을 때마다 학생수가 부쩍부쩍 줄었다. l919년 3· 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주모자급 학생 30여명이 퇴학처분을 받거나 스스로 학교에서 물러났다. 나도 학교를 그만두려했다. 그래서 한달 가까이 집에서 쉬고 있으려니 어느날 같은 반 급우들이 찾아와 학교에 다시 나오도록 설득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를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들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합방의 충격으로 학생들이 절반 가까이 결석을 하자 당황한 학교측에서 교직원과 학생들을 동원, 적극적인 설득작업을 폈다 한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책가방을 다시 챙겨 등교했다.
만약 그때 학교를 그만 뒀더라면 내 일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고 지금도 가끔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그 후 무사히 졸업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의 설영순(전 서울대병원 내과과장·작고)과 함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는 행운을 얻어 일본 대판의대에서 의사로서의 길을 걷게됐기 때문이다.
합방 이후 학교생활은 여러가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우선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아침 조회시간이면 『황국신민으로서의 자부심…』운운하는 일본인 교장(7대 강원보)의 훈시였다. 어린 마음에도 왠지 붙쾌했고 짜증스러웠다.
이때부터 일제는 「일친동인」이라는 허울 아래 한국은 속지가 아니라 내지(일본본토를 가리킴)라고 주장하면서 철두철미한 무단점치를 실시하였다.
학교교육 또한 황국신민화라는 것을 그 기조로 하였다.
이 기간동안 총독부가 내세운 교육지침은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 구실 Eoa에 총독부는 한국에 와 있는 일본인 교육을 위한 학교제도와는 별도로 한국인에게만 적용되는 학교제도를 마련했다. 즉 보통학교 3년 또는 4년, 고등보통학교 4년과 여자보통학교 3년, 전문학교 3년 또는 4년이라는 열등한 제도를 만들어 한국인을 교육적으로 차별하는 방침으로 나갔던 것이다.
이같은 학교제도 때문에 고등보통학교 졸업생들은 상급학교에 진학하는데 애를 먹었다.
즉 고등보통학교는 일본인의 중학에 대응하는 것이었으나 일본인 중학이 5년제였는데 비해 4년제였으므로 고등학교나 대학 예과 혹은 전문학교에 진학할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고 다만 별과생의 자격으로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고등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일본인 중학 5년에 편입학하는 등의 편법을 써야했다.
다만 총독부유학생 등 극소수의 우수한 학생둘은 추천에 의해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이같은 교육제도에 대한 법적 근거가 소위 제1차 조선교육령 이었다.
이 조선교육령은 모두 30조로 된것으로 『교육은 교육에 관한 칙어(1890년 일본천황이 내린)의 취지에 의지하여 충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한다』고 교육목적이 명시되어있다(제2조) .그리고 교육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세와 민도에 적합하게 함을 기한다』 고 되어있다(제3조). 이에 따라 교육을 크게 보통교육·실업교육 및 전문교육으로 나누었고 (제4조), 특히 보통교육은 『보통의 지식·기능을 주고 특히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며 국어 (곧 일본어)를 보급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했다..
이 조선교욱령 실시와 동시에 종전의 고등학교는 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따라서 관립한성고등학교는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서울의 명칭 『한성』이 합병과 동시에 『경성』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한성』의 명칭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경성고등보통학교시대(19l1∼1921년)의 막이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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