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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9)야구에 살다(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고교야구의 정상을 12년만에 서울로 가져온 경기공고에 이어 전국 패자의「바통」을 이어받은「팀」은 역시 서울의 경동고다.
59년 황금사자기대회 우승으로 두각을 나타낸 경동고는 60년엔 국내 전「타이틀」을 휩쓸면서 연전연승, 무패의 신화를 남겼다.
59년 한태동 감독의 뒤를 이어「스파르타」훈련으로 유명한 김일배 감독을 초빙한 경동고는 60년 국내 경기에서 공식·비공식경기를 포함, 1년 동안 52승3무라는 무패의 신화적인 기록을 세웠다. 다만 경동고는 일본원정에서 2패를 당했을 뿐이다.
이 당시 경동고의「나인」은 투수 이재환·주성현, 포수 백인천, 1루수 이용숙, 2루수 김휘만, 3루수 오춘삼, 유격수 김영호, 좌익수 현아남, 중견수 김정호, 우익수 김영민 등이었다.
이중『원자탄 투수』란 애칭을 들은 이재환은 중학 3학년때인 57년 대전한밭중에서「스카웃」, 고등학교 때부터 백인천과 황금의「배더리」를 이루었다.
백인천 역시 중학 2학년때 성동중에서「스카웃」됐는데 처음엔 유격수와 투수로 기용되다 고등학교에서 포수로 전환, 천부의 재질을 발휘하게 됐다. 백인천은 중학생때엔 체격도 그리 크지않은데다 뛰어난「플레이어」도 아니었다. 그러나 백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연습벌레』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지독한 훈련으로 체격도 우람해지고 천부적인 재질로 스타」로 부각됐다.
백은 학교훈련은 물론 집에서도 밤늦게까지「스윙」연습을 하는 등 오직 야구에 전념, 결국 해방 후 한국선수로는 처음으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했던 것이다.
백인천은 야구이외에 육상과「스케이팅」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백은 1백m를 11초대에 달리며 빙상 5백m에선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었다.
이재환은 한밭중「에이스」로 전국체전 2회전에서 경동중과 연장 37회라는 한국야구사의 최장기록을 남길때 혼자 37「이닝」을 던진 장본인이다. 이때 경동중은 강봉백과 백인천이 교대로 던져 110으로 승리한 끝에 상대방 투수인 이재환을「스카웃」하게 된 것이다.
37회초 경속중은 2번 백인천이「아웃」된 뒤 3번 명정남이 좌월3루타를 터뜨리고 4번 이용숙의「스퀴즈·번트」로 그야말로 황금의 결승점을 뽑아냈다.
경동고는 막강한 위력으로 미군들과의 친선경기에까지 출전, 연승을 거두었으며 성인야구의 최고봉인 전국선수권대회에까지 출전신청을 했으나 실업「팀」들이 지면 망신이라고 크게 반발, 결국 고교「팀」의 출전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 당시 재일동포 야구「팀」이 여름방학을 이용, 모국에 와서 친선경기를 벌여 인기를 모았다. 경동고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60년엔 재일동포「팀」이 특히 강해 경남고와 1-1, 경동고와 3-3으로 두차례 비겼을 뿐 13승 무패를 기록했다. 그래서 주최측은 9월10일 재일동포와 경동고와의 경기를 최종전으로 한차례 더 벌이도록 했다.
이대전에서 경동고는 1회말 2사후 3번 오춘삼의 우전안타에 이어 4번 백인천이 좌측「스탠드」에 꽂히는 통렬한 선제2점「홈런」을 터뜨려 결국 4-2로 쾌승, 재일동포「팀」에 기어이 1패를 안겨줬다.
56년부터 시작된 재일동포고교「팀」의 모국친선경기는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의「아이디어」였다.
재일동포의 모국방문은 신문사 사세확장에도 도움을 줬을 뿐만 아니라 한국야구 발전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6년 제1회 모국방문「팀」의 일원인 배수독과 현성호를 비롯, 뒤의 박정일·김성근 등도 모두 국가대표선수로 맹활약, 모국 야구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특히 재일동포「팀」의 모국방문은 조국을 전혀 모르던 2세들에게 올바른 조국관을 일깨워 주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얻었다. 그래서 배수찬 같은 선수는 가족들이 모두 북송선을 탔음에도 끝내 이를 뿌리치고 자유대한에 머무르며 기은선수를 거쳐 패철 창단「코치」로 활약했다.
그러나 재일동포야구「팀」중 가장 인상깊은 선수는 부세출의「스타」장동이다. 장동은 58년 제3회 재일동포 모국방문 선수단과 함께 처음으로 모국땅을 밟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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