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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인천고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55년 제10회 청룡기쟁탈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동산고I인천고의 결승전은 50년대의 잊지못할 명승부다. 2년동안 전국무대를 휩쓸어온 인천고는 3연패를 눈앞에 두고 있었으며 해성처럼 등장한 신인 신인직이 이끄는 동산고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펼치는 의지에 불타 있었다.
동향의 대결인 결승전은 인천에서조차 완전히 두 갈래로 나뉘어 『동산고가 전력도 뒤질뿐더러 인천고의 3연패를 위해 양보하는 것이 좋다』는 측이 있는가하면, 『신인직이 만일일부러 막 던지는 경우엔 가만히 안두겠다』는 층등으로 흥분이 고조되었다. 이같은 열기속에 6월5일의 서울운동장은1만5천여명의 관중으로 초만원을 이뤘다.
인천고는 연습경기에서 일방적으로 이긴 터여서 이날 결승전만은 자신만만했다.
인천고는 이기양-한학수, 동산고는 신인직-임준호롤 각각「배터리」로 내세워 3회까지 득점없이 나갔다. 그러나 인천고는 4회초 1사후 주자를 2루에 두고 6번 김경이 우중간을 빠지는 맹렬한 3루타를 터뜨려 선취점을 울려 관록의 「팀」인 임을 보여줬다.
그렇지만 동산고도 7회말 5번 신인식과 7번 박의양의 안타로 1사 1, 3루의「찬스」때 박이 2루「스틸」을 시도, 이를 잡으려던 인천고 포수 한학수의 견제구가 악송구되는 틈에 3루에 있던 신인직이「홈」에 뛰어들어 극적인 「타이」를 이뤘다 이렇게되자 운동장은 열광의 도가니가 됐으며 서울관중들은 선린상이 두번이나 패한 앙갚음을 하려는 듯 모두 동산고를 응원했다. 계속된 동산고의 공격에서 8번 곽인성이 안타섬「라이너」를 때렸으나 인천고유격수 김진형이「다이버」하며 잡아내 3루로 뛰던 2루 주자마저 「아웃」시켜 깨끗이「더블·플레이」를 성공시켰다.
이후 두 「팀」 모두 팽팽한 투수전으로 연장전에 돌입했는데 11회말 어이없는 폭투로 대승부는 끝나고 말았다. 11회말 동산고는 1사후 연속2안타가 작렬, 또다시 주자를 l. 3루에 두었울매 인천고투수 이기양의「원·바운드」로 뛰는 폭투가 나와 3루 주자 박의양이 「홈」인, 동산고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인천고는 이낱 지독히 승달이 없어 안타성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날아가는 등 경기가 풀리지않아 3연패의 꿈이 무산되고 말았다. 특히 인천고 감독김선웅은 위기나 「찬스」때면 망을 손등으로 긁는 습관이 있는데 이날 결승전이 끝났을땐 열손가락 손톱끝에 모두 피가 맺혀있었다.
1년생 투수 신인직이 투타에서 활약한 동산고는 이후 부적합대로 군림, 전국무대를 휩쓸었다. 동산고는 56년 결승에서 중앙고를 1-0으로, 57년 결승에선 또다시 동향의「라이벌」인 인천고를 3-1로 각각 이겨 청룡기대회에서 고교야구사상 처음으로 3연패란 위업을 달성했다.
그래서 동산고는 운보 김기창화백이 청룡상을 그렸고 성재 김태석이 명제휘호를 쓴 역사적인 청룡기를 연구히 차지하게되어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다.
동산고가 청룡기대회에서 3연패한 기록은 70년대 경배고가 대통령배대회에서 3연패하기까지 어느 「팀」도 이룩하지 못한 빛나는 금자탑이었다.
동산고 3연패의 주역은 단연초고교급 투수 신인식이었다. 1학년매부터 「쿨린업· 트리오」로 루타에서 맹활약한 신인직은 불같은 강속구를 뿜어내며 3년동안 상대 「팀」 타자들을 농탁했다.
신은 보통 한 「게임」에 평균15개정도의 삼진을 뺏어내면서 지금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노히트·노런」도 상당히 수립했다. 신은 투지도 남달리 뛰어나 투수가 잡지 않아도 되는「캐처· 플라이」나 1루쪽 「플라이」까지 달려가 잡아내는 전력적 선수로 「팀」에 활기룰 불어 넣곤 했다.
이 당시 신인직때문에 빛을 못본 투수들이 많지만 특히 내가 감독으로 있었던 중앙고의 박룡호투수도 그 중의 하나다. 박룡호는 「스피드」가 뛰어난 유망한 투수이면서도 중앙고가 동산고에 청룡기결승을 비롯, 세차례나 1점차로 패하는 바람에 그늘에 가리우고 말았다.
한편 동산고하면 박신덕감독(박신직씨 실형)을 빼놓을 수 없다.
48년에 상업 선생으로 부임, 야구부감독을 맡은 이래 애오라지 30년 동안 야구부를 이끌다 3년전 정년 퇴직했다.
교육과 야구 지도보다는 이해 관계로 옮겨 다니는 요사이 고교야구감독 풍토를 볼 때 귀감으로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고 구도인천의 화려한 건성기도 신인식의 졸업으로 급강하, 58년부터 고교야구에는 서울세가 대두, 60년대 후반 경배세가 나올때까지 주름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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