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보감 글귀 읽은 원고·피고 2년 끌던 소송 합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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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지법은 여름 휴정기간에 갤러리로 변신한 ‘예술 법정’을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오픈코트(Open Court)’ 행사를 7일까지 연다. [송봉근 기자]
안내를 맡은 강민구 창원지법원장(왼쪽)이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6일 창원지방법원 대법정. 해안가 바위틈의 조약돌을 그린 동양화들이 걸려있다. 뇌성마비를 이겨낸 한경혜(39) 화백의 ‘보금자리’ 등 6점이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나 뇌성마비를 앓았지만 7살부터 32년간 매일 1000배를 하며 병을 이겨낸 화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을 2번 했다.

 “이곳은 살인 같은 중범죄자를 재판하는 법정입니다. 그림은 피고인들이 마음만 고치면 새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안내를 맡은 강민구(56) 창원지방법원장의 설명이 이어진다. 갤러리로 변신한 법정을 여름 휴정기간에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오픈코트(Open Court)’ 행사에서다.

 강 법원장은 올 3월 취임한 뒤 16개 법정과 8개 조정실에 그림과 서예작품 110점을 거는 ‘예술법정’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법정에 ‘사군자의 방’ ‘명심보감의 방’ 등의 이름을 지었다. 법정마다 재판 성격에 맞는 작품을 걸고 입구에는 작가 소개와 작품 해설판을 붙였다. 가장 먼저 손댄 곳이 소년법정 대기실. 쇠창살을 없애고 휴게실처럼 꾸민 뒤 화사한 꽃과 백로 사진작품을 걸었다. 백로처럼 하얀 마음을 갖고 꽃처럼 다시 피어나라는 뜻이다.

 그는 “처음 사법처리를 받는 우리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부모들에게는 평생의 아픔으로 남는 쇠창살을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고 말했다.

 이혼소송을 다루는 가사 법정 대기실에는 석양에 두 사람이 걸어가는 사진작품 ‘동행’(이승은 작)을 걸었다. 그 사진 아래는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쉽게 지치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글도 붙였다. 이혼소송 하러온 부부가 이 사진을 보고 재결합하기를 바라는 사진이다.

 민사소송 조정실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명심보감 글귀를 담은 서예작품을 걸었다. 지난달 초에는 명심보감을 읽은 원고와 피고가 2년 끌어온 민사소송에서 조정에 합의하는 ‘첫 경사’가 있었다. 제4민사합의부 신상렬 부장판사는 25호 조정실에 걸린 황홍진 서예가의 ‘족함을 알아 항상 만족하면 평생 욕됨이 없고 그침을 알아 때 맞추어 그치면 평생 치욕이 없다”는 명심보감 글귀를 원고· 피고에게 읽어보도록 권했다. 원고인 하도급업체가 2억원을 요구하며 2년을 끌어오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이 글귀를 읽은 뒤 양측이 5000만원에 합의했다.

 강 법원장은 “예술작품이 사람의 심성을 부드럽게 하여 극한 대립을 사라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창원지법 집계결과 예술법정이 시작된 3월31일부터 6월30일까지 조정화해율은 51.1%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40.5%보다 높았다.

 예술작품들이 재판에 참여하는 판사들의 마음도 다잡고 있다. 제4민사합의부가 사용하는 212호 민사법정엔 신상렬 부장판사의 화가 부인과 아들, 최아름 배석 판사 어머니의 그림이 걸렸다. 최 판사의 어머니 고(故) 박덕기 화백의 그림 ‘봄밤’은 최 판사가 어릴 때 집 앞 개울가에서 책을 읽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신 부장판사는 “가족들이 내려다보는 것 같아 재판을 할때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강 법원장은 2년 전 스웨덴 웁살라 지방법원 등에 견학 갔다가 유럽 법원이 카페와 미술관처럼 꾸며진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창원지법원장으로 발령받으면서 그때 받은 감명을 실천에 옮겼다.

 창원지법원장 부임 선물로 개인적으로 받은 박시호 행복편지 발행인의 사진 작품을 대법원 재산으로 기증했다. 이를 전해들은 박 발행인은 사진 3점을 더 기증했다. 이 사진을 창원지법 직원이 유튜브 동영상에 올렸다. 이를 본 예술계 인사들의 자발적인 기증이 이어졌다. 고 전혁림 화백의 비싼 그림을 대여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강 법원장은 “냉철한 법률적 판단도 중요하지만 재판 당사자들의 앙금까지 치유하는 것이 좋은 재판이다. 예술법정은 사법서비스의 수요자인 국민의 시각에서 법정 환경을 재설계해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되찾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 법원장은 2001년 대구지법 민사합의부 재판장 시절에 모자간에 벌어진 재산분쟁을 음악으로 해결한 경험이 있다. 욕설을 주고 받던 양측에게 진정하라며 불효자의 애끓는 탄식을 노래한 ‘회심곡’을 들려주자 감정을 누그러뜨려 조정문에 서명했다고 한다. 2003년 성남지원 형사단독 판사 시절에는 선고시각을 기다리며 긴장해 있는 방청객들에게 휴대용 CD플레이어로 음악을 틀어주기도 했다.

창원=김상진·위성욱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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