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현장 속으로] 퀸즈의 마지막 한인 상인들

미주중앙

입력

퀸즈 엘름허스트 브로드웨이 75스트릿에 있는 황제 비디오. 김영원 사장이 비디오 테이프를 정리하고 있다.

퀸즈 엘름허스트 브로드웨이 75스트릿에 있는 비디오 대여업소 '황제비디오'에 들어서자 업소 천장까지 빼곡히 쌓인 비디오테이프가 시야를 압도한다. 업소 가득히 차 있는 비디오테이프들 사이에서 업주 김영원씨가 비디오테이프 복사 작업을 하고 있다.

각종 비디오 영상물을 '구워내는' 김 사장의 손길이 분주하기만 하다. 웬만한 영화나 드라마는 인터넷으로 보는 시대가 되면서 DVD플레이어조차 보기 힘든 요즘 비디오테이프를 이렇게 많이 만드는 까닭은 뭘까.

"노인들은 아직도 비디오가 익숙해. 우리 가게에는 비디오테이프를 찾는 노인 손님들이 여전히 많아. 이 때문에 이 일을 멈출수가 없지."

김 사장은 지금도 하루 평균 영상물 1편당 20개의 복사본을 제작한다. 이 가운데 비디오 테이프가 차지하는 분량은 20% 정도다. 나머지는 DVD와 CD로 만들어진다.

김 사장은 "한인 노인들은 최신 드라마보다 '대조영' '연개소문' '거상 김만덕' 같은 이미 종영된 사극을 더 선호한다"며 "처음 문을 열었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나를 찾아오는 이런 손님들 때문에 비디오 복사 작업을 멈출 수가 없다"고 했다.

'황제비디오'를 나와 인근 우드사이드애브뉴로 발길을 옮겼다. 두 블록을 올라가 77스트릿에 다다르자 이발소를 상징하는 삼색등이 보인다. '뉴욕이발관'이라고 적힌 업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착착착' 가위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실내에는 아주 오래된 붉은색 이발용 가죽의자 네 개와 누렇게 색이 바랜 동전 공중전화기가 보인다. 업소 내부 소품만으로도 30년이 넘은 이 업소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손님의 턱수염 면도까지 마친 이발사 배성도씨가 기자와 마주 앉았다.

“전자이발기로 하면 빠르고 쉬울텐데 가위질이 귀찮지 않나”라고 묻자 배씨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는 “아직도 전자이발기보다 손가위가 편하다”고 말했다. 그 때 손님인 김창규씨가 거들고 나선다. “배 이발사보다 오히려 내가 이곳 이발소 경력이 길다”는 김씨는 “10분 만에 바리깡(전자이발기)으로 머리카락을 ‘찌익’ 밀고 끝내는 다른 이발소보다 40분 동안 가위로 손질해주는 배 선생님이 있어 다행”이라며 배씨를 치켜세웠다.

김씨는 30여 년 전 처음 문을 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곳을 찾고 있다. 퀸즈의 동쪽 끝 리틀넥으로 이사를 갔고 20여 년 전 배씨로 주인이 바뀌었지만 이발은 꼭 이곳에서 한다. 그는 “20년 넘게 사는 곳은 변해도 머리 스타일과 언어만큼은 바꿀 수 없더라”고 말하며 업소를 나섰다.

배씨는 “일부 손님은 두꺼운 전화번호부에서 이곳을 찾아 오기도 한다”며 “손님이 예전보다 90% 이상 줄었다. 하지만 이렇게 끊임 없이 찾는 손님들이 지금까지 운영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인 것 같다”고 말했다.

‘황제비디오’ 김 사장과 ‘뉴욕이발관’ 배 이발사는 퀸즈 중부 상권을 지키는 몇 안 되는 한인 상인들이다. 이곳 엘름허스트는 20여 년 전만해도 '제2의 플러싱'으로 불릴 정도로 한인 상권이 전성기를 누렸던 곳이다. 하지만 베이사이드, 롱아일랜드, 뉴저지 등지로 한인 인구가 옮겨가면서 한인 상권도 쇠퇴했다. 30년 넘게 운영돼오던 한인 마트 ‘뉴욕종합식품’도 2개월 전 문을 닫았다. 신도 200여 명이 다니는 뉴욕초대교회도 최근 베이사이드로 이전했다. 한인 식당도 10여 곳이 성업했지만 지금은 ‘청기와’와 ‘해운대’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청기와는 이 지역 한인 상인들 사이에서 ‘한인 업소 1호점’이라고 불린다. 지난 35년 동안 업주도 세 차례나 바뀌었다. 지금 청기와를 운영하고 있는 김윤현 사장은 “엘름허스트·잭슨하이츠 등지는 생활 형편이 어려운 초창기 한인 이민 1세대들이 모여 살았던 ‘달동네’같은 곳”이라며 “엄마 손을 잡고 오던 아이가 이제는 백발이 된 어머니 손을 잡고 추억삼아 이 곳을 찾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 식당 주방장으로 일했던 김 사장은 그러한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식당 이름도 안 바꾸고 그대로 쓰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고객층도 바뀌어 지금은 타민족고객이 80~90%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퀸즈 중부 상권엔 한인 이민 역사의 추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또 그 추억 속에는 디지털 시대에 가려 보이지 않는 ‘아날로그’의 향수가 묻어 있다.

한인들이 남겨 놓은 아날로그의 향수가 이젠 타민족들의 현실이 되고 있다. 한인들이 빠져나간 엘름허스트와 잭슨하이츠 일대에는 인도·네팔·티벳·대만 이민자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박상섭씨가 10여 년 동안 운영하고 있는 PC방 ‘쥐넷존’에는 푼자브나 히잡을 두른 손님들도 더러 있다. 컴퓨터를 잘 쓸 줄 모르는 인도 노인 등이 찾는 관계로 쥐넷존의 일부 컴퓨터는 아직도 ‘팬티엄'이다.

박씨는 “우리 가게 손님들에게 필요한 건 최신 성능의 컴퓨터가 아니라 이 세상과 소통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퀸즈 중부 상권이 번성했을때는 퀸즈중부한인회라는 별도의 한인 단체도 운영됐지만 지금은 퀸즈한인회로 통합된 상태다. 그러나 이 지역 한인 상인들은 이 지역을 대표할 별도의 단체 조직을 추진하고 있다.

청기와의 김 사장은 “더 늦기 전에 옛 것을 그대로 간직한 이 곳 마지막 한인 상점들이 뭉쳐야 한다”며 “다른 한인 상인들과 단체 설립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동찬 기자·이조은 인턴기자 shin73@koreadaily.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