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 당한 「팔레비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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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0세를 일기로 영면한 「팔레비」「이란」전왕은 근대화의 강한 의지를 지닌 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회교 사원의 기득권을 부인한 그의 토지개혁은 대담한 사회 개조 운동이었다 .회교 지도자들의 「팔레비」에 대한 저항은 이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팔레비」는 왕권의 수호를 위해 혹독한 탄압을 폈다. 56년에 참살된 「사바크」(비밀경찰)는6만 여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3천5배만 국민을 철저히 감시했다. 그의 79년형「캐딜락」승용차는 「질주하는 난공 불락의 요새」로 불렸다. 완벽한 방탄 등의 안전 장치를 한 이 승용차의 제작비는 무려1억2천만 원. 그의 저택은 원·수 공격도 막아내는 방공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왕족이 살았던 「니아바라」궁전은 수 만 명의 경비대가 물샐틈없이 지켰다.
「팔레비」는 또 1년에 거의 1백억「달러」의 군사비를 가졌다. 서기 2천년에 세계 5강의 군사력을 목표로 했다. 군사력의 급속한 증강은 외침에 시달렸던 「이란」의 안보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는 설명이었지만 왕권 안보의 방패 역할을 더 철저히 했다. 「팔레비」는 이렇듯 왕권 안보의 안전판을 거의 완벽하기 해놓았었다.
「팔레비」는 막대한「오일·달러」는 물론 왕권과 왕가를 위해서만 쓴 것은 아니다. 「오일·달러」 는 「백색 혁명」이라는 민족 개조 운동과 경제 개발의 자원으로도 대량 투자되었었다. 73년 유가의 대폭 인상 이후「이란」은 한 해에 최고 50%의 경제 성장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회교 사원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비롯된 회교 지도자들의 반「팔레비」운동이 왜 그처럼 국민적 호응을 받았을까. 민족 개조를 주장한 「팔레비」가 왜 하루아침에 추락해야 했는가.
「이란」국민들은 경제 발전의 혜택을 고루 입지 못했다. 그래서 대다수 국민의 눈에는「팔레비」의 개혁 의지보다 왕권을 지키려는 탄압만 비췄을 뿐이다. 그것이 「팔레비」를 재촉한 것은 아닌지. 「팔레비」의 개혁 의지가 국민들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 「팔레비」나 「이란」국민 모두의 오늘의 불행을 초래한 으뜸 되는 원인은 아닐까.

<조동국 외신부 차장·전「이란」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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