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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5)제68화 개헌축사 사사오입개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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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년의 세월이 흘러 발췌개헌안의 후유증이 거의 잊어질 무렵인 54년1월23일. 자유당정부는 돌연 경제조항개헌안을 2대국회 막판에 내놓았다.
「5·26」정치파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처 대통령의 3선 금지조항을 철폐하지 못한 이승만박사 지지세력이 언젠가는 「종신집권」도 가능케하는 또 다른 개헌안을 내놓을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이 정계에 나돌던터라 우선 국회의원들은 「개헌」이란 단어에 눌라움을 표시했으나 그 내용이 경제조항에 국한된 것을 보고 다소 안도하는 듯 했다.
그러나 정부가 극비리에 추진해 내놓은 이 경제조항 개헌안은 나중에 「사사오입」개헌으로 이어졌으니 결국 경제조항은 이박사의 종신집권을 위한 관측기구에 불과했다.
국회가 자유경제체제로의 전환을 표방한 이 개헌안을 놓고 대체토론을 마치고 표결의 단계에 이르렀을때 정부는 갑자기 이를 자진철회해 버렸다.
자진철회한 것은 발췌개헌안 통과에 앙심을 품고 있던 야당의원들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데다 개헌을 연중행사로 하느냐고 여론이 빗발치고있어 자칫 「종신제개헌」이란 목표에 차질을 빚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조항개헌안을 철회한 뒤에 2대국회에 대한 이박사의 불쾌감은 좀처럼 시들지 않았다.
이박사의 경화된 태도가 풀리지 않자 자유당의원들조차 이탈의 기미를 보였다.
이박사는 「5·20」 3대국회 선거를 앞두고 현역 자유당의원중 다수를 탈락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자유당전당대회 「유시」에서 『현 국회는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 말을 들었으니 다음 국회에서는 나라를 위하는 사람을 뽑도록 하라』고 말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이박사 지지세력은 비밀리에 의원들을 상대로 대통령종신제개헌안에 누가 찬성할 수 있는 사람인가의 여부를 타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자유당 원외당원과 정보기관을 동원해 약50명의 의원들로부터 「민중이 요망하는 개헌취지」에 찬성하는 서명을 받아냈으며 믿음이 약한 기존 측근세력을 하나 둘 멀리하기 시작했다.
발췌개헌안 통과에 1등 공신이라고 할수 있는 장택상총리를 백두진씨로 바꾸었고 부산청치파동때 철권을 휘둘렀던 이범석전내무장관도 족청계 거세와 함께 권력의 핵에서 밀려났다.
주변정리를 대충 끝낸 이박사는 3월26일 『조만간 개헌할 일이 몇가지 있으나 국회의 임기가 끝나가는 지금에 와서 개헌하는 것은 곤란하므로 차라리 다음 국회에 내놓을까하니 유안해주기 바란다』는 장문의 성명을 발표했다.
정치적 책동이 대개 그러하듯 이박사는 성명에서 『국민들이 헌법에 의해서 나를 다시 선출시킨다면 특별한 관계가 없는한 목숨자라는데까지 봉사하겠으나 초대대통령 종신제라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연막을 쳤다.
이렇게 정지작업을 진행시킨 자유당은 3대선거에 사상 처음으로 공천후보제를 택했다. 그러면서 공천후보자에게 국민투표제와 대통령중심조항철폐 개헌안에 찬성한다는 각서를 받고 공천장을 주었다.
그리고 이박사는 다음 국회에는 친일파가 들어와서는 안되며 입후보자는 먼저 국민앞에 국민투표제 개헌안을 찬성한다는 확약을 해야한다고 자유당후보들의 행동지침을 시달했다.
「5·20」선거는 자유당이 l백81명의 공천후보와 61명의 비공인후보를 냈고 민국당이 77명, 국민회 48명, 대한국민당 15명, 조민당 6명, 대한노총이 5명을 각각 공천했으며 무소속 7백97명이 나서 무려 5대1이상의 경쟁율을 보였다.
종신제개헌을 위해서는 3분의 2를 점해야겠다는 자유당의 욕심이 「5·20」선거를 관권개입선거로 만들었으니 또하나의 악례가 생긴 셈이다.
이박사로부터 충성도에 합격점을 받고 나온 자유당 후보들중엔 신진들이 많았으나 자금과 조직면에서 야당후보와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프리미엄」을 받았다.
이에 반해 자금과 조직면에서 열세에 놓였던 민국당은 77명에게 공천을 주었으나 선거일공고때까지 겨우 40여개의 시·군당부를 결성했을 뿐이다.<계속>

<필자소개>
필자 조영규씨(68)는 제헌·3·4·5대 국회의원을 지낸 4선의원이고 지금은 고향인 전남 영광에서 「조의원」을 개업하고 있다. 71년 대통령선거때 김대중후보의 참모장을 맡은 것을 끝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한민당에서 정당생활을 시작, 그후 민국당·민주당·신한당·신민당에 이르기까지 야당의 맹장으로 활동했으며 자유당때 원내에서 고김선태씨와 함께 독설가로 통했다.
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지명전에서는 김대중씨의 대리인으로 주요역할을 담당. 제1고보(경기고)·북경대학경제과(2년중퇴)를 다녔고 45년 32세에 독학으로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지금은 향리에서 인술에만 열중하고 있으며 지난선거때 아들(조기상씨)의 입후보를 도왔으나 정치의 대를 아직 잇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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