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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2)등원호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장택상국무총리가 이끄는「신나회」가 자유당합동파와 연합하여 발췌개헌작업을 주도적으로 벌이는데 맞서 민국당이 등원거부전략을 쓰게되자 여당은 원내외에서 야당을 협공했다고 지방의회 의원들이 거의 매일 의사당밖에 포진하여 소란을 떨면서 국회해산을 요구하더니 토요일인 6윌28일에는 지방의회대표라는 2백여명이 5시간30분동안이나 국회의사당을 포위하여 의원들이 나가지 못하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이와함께 자유당합동파는 이갑성의원(대구병)을 대표로 한 61명의 이름으로 「국회자율해산결의안」을 내놓아 비협조적인 야당을 위협했다.
『…국회는 헌법이 지워준 절대적 사명을 수행치 않으am로써 그 기능이 사실상 상실되었을뿐 아니라 그간 일부 불순 국회의원이 자기 정파적 정치목적을 위한 농단술책으로 민족의 의분은 폭발되었고 민주정치의 지상명령자인 거족적 민의가 전국각지의 지방의회를 통해 현국회는 해산해야한다는 심판의 대령이 내렸다.
국회는 이제 민의가 떠난 이상 긴박한 국정을 섭리할수 없는 즉, 현국회를 즉시 해산하고 총선거를 통하여 새 국회를 출현케 함이 오히려 애국적 행위라고 은료된다.』
이들이 결의안에서 나열한 국회의 「죄상」은 다섯가지에 이르렀다.첫째,현역장교를 살해한 서민호의원과 국제섭혁을 기도한 의원을 석방 결의한 것.둘째, 계엄령 해제를 결의한 것. 세째,「유엔」한위성명의 내정간섭여부를 알아보겠다는 민족 정기의 정당한 동의를 부결한 것. 네째,당면 중요과제인 헌법개정문제를 두고 일부의원이 고의적 출석거부로 국회를 유회시키고 있는 것. 다섯째, 국회의원으로서 대통령암살의 망국적 흉계를 주모 지휘한 사건등.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국회를 해산하자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일종의 야당의원에 대한 협박이라고나 할까.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7월1일 고등군법회의는 서민호의원에게 사형을 선고하여 그의 석방을 결의하기까지 했던 국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날 시작된 제13회 임시국회의 개회식이 있은 후 출석의원 77명의 비공식 간담회가 있었다.이 자리에서 장택상총리는 『앞으로 지방의원들의 시위는 없을 것이며 의원신변은 보장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의원들은 국회에 출석하여 발췌개헌안 통과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정부와 여당은 7월4일까지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려는 일정을 짜놓았는데 국회의원들이 잡혀가거나 피해다니느라 나오지 않으니 일이 곤란해졌다.
7월2일에는 본 회의가 정원미달로 유회됐다. 그렇게되자 출석한 의원들의 개인행동을 막기 위해 의사당을 떠나지 못하게 철야를 시켰다.
다급해진 장총리는「라디오」방송을 통해 국회의원의 신분을 보장하고 자유를 줄테니 등원하라고 시시각각으로 호소했다.
뿐만마니라 이범석내무부장관은 경찰을 동원해 피신한 의원들을 찾아가「지프」로 모셔 국회로 안내했다.피신이라고 하지만 개중엔 어설프게,반공공연히 거처를 노출시키고 지내어 국회에 나가지만 않을뿐인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은 경찰이 찾아가면 못이기는체 하고 국회에 나갔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국제공산당관련혐의로 헌병들에게 끌려가 한달 보름 가까이 구속되어 있던 11명의 국회의원중 서의원을 제외한 10명이 발췌개헌안이 처리되기 하루전인 3일 돌연 석방됐다.
이들 가운데 양병일·이석기·장홍염의원은 불기소로 석방된 것이고 곽상동·이용설·권중돈·임흥순·김의준·정헌주·서범석의원은 국정논의에 참여시키기위해 가석방했다.석방되자마자 의사당으로 안내됐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피신했던 의원들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국회에 등원하겠다는 사람이 생졌다.
나는 숨어 지내던 집을 떠나 엄상섭·태완선·이채오(통영을)의원등이 숨어있던 집으로 찾아갔다.그들은 김봉재의원(창원을)이 주선해준 꽤 좋은 집에 피신해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국회로 나가자고 말했다.엄의원등은 『정부가 하는일에 대해 정정 당당히 맞서서 반대의 기록도 남겨야한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거기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불출석만이 유일한 개헌저지방법이다.이제 최종적인 마당에 와서 국회에 나가 반대의사를 밝힌다해도 전부 찬성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그것은 공연히 정부쪽 개헌을 합법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 말을 하면서 동료의원들을 붙잡고 울었다.
내 기억에 끝내 나가지 않은 사람은 김영선·박순천(종로갑)의원정도로 생각되는데 국회기록에는 19명으로 되어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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