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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제갈길 찾아 조용한 변신 준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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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0·26」직후 스스로 해체론을 들먹이며 자체 내 갈등과 호된 여론의 십자 포화 속에 우왕좌왕하던 유정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차 냉정을 찾는 듯하다.
겉으로는『우리의 진실된 선택이 고초와 시련 속에 종말을 고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정신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자』며 존재 가치를 확인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속으로는 저마다 불안과 동요 속에서「내일」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 역연하다.
기능 대표로서 기능을 다하기보다는 위만 보고 공화당과의「충성 경쟁」을 벌이다「10·26」을 당하고 보니 누구 하나 붙잡고 하소연할 데도 없는 형편이라고 한 의원은 실토했다.

<세비 일부로 적금 들기도>
오로지 시간의 흐름과 비례해 여론이 잊어 주기만을 바라면서 내년 선거를 앞두고 범여권 의 단합과 승리에 기여한다는데 다수 유정회 의원들이 명분을 찾고 있다.
당장은 매월 1백50여 만원씩 세비를 타고 그들을 뽑아 준 유신 환경이 지속되고 있어 네 차례나 사표를 낸 이종찬 의원을 제외하고는 조직의 골격이 흐트러질 것 같지 않지만 오는 가을 새 헌법이 만들어지고 공화당이 전당대회를 열 때 어차피 뿔뿔이 흩어져 각자 갈 길을 선택해야 할 입장이다.
지난 79년 3월에 들어선 유정회 3기의 임기는 82년 3월까지.「10·26」과 같은 일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교원 가운데는 3개년 계획으로 세비의 일부를 떼어 은행 적금에 들었거나 계에 가담한 의원도 있다.
지역구 출신 의원들처럼 선거 구민을 접대해야 할 일이 없고 지역구 관리에 드는 돈도 없어 이같이 살림 관리를 하는 의원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이런 유정회 의원에게「10·26」은 더 큰 충격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최규하 대통령이 개헌「스케줄」을 밝히기 전 정부 일각에서 유정회 임기까지 과도정부를 이끌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유정회 의원들은 일말의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내년 상반기 중에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새 정부가 들어설 때 유정회는 어쩔 수없이 해체된다. 1년 가까이 수명이 단축되는 셈이다.
임기를 단축한다는 면에서만 보면 6년 임기의 지역구 출신이 내심으로 더 억울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총선에 나서는 입장의 차이 때문에 실제로는 유정회 쪽의 초조가 더한 것이 설정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어떤 여성 의원은 이종찬 의원의 의원직 사퇴서가 처리되는 것을 봐 그 뒤를 따르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이런「무드」가 생기면 유정회는 예상보다도 빨리 해체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최근 개헌 논의 과정에서 유정회는 외롭기 한이 없다. 국회 개헌 특위에「멤버」가 들어가 있긴 하지만 발언권이 약하다.
이런저런 것을 감안해『얼른 내놓기가 싫다』『사무실에서 책이나 읽고 있다』『차라리 빨리 상황 변화가 왔으면 좋겠다』는 의원도 있다.
아직 확연히 구분되지는 않지만 유정회 의원들은 △계속 정치 참여군△관망군△정계 은퇴 또는 전문직 복귀군으로 나뉘어 진로를 찾고있다.·

<개헌 논의서 발언권 약해>
공화당 공천으로 내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출마하기를 희망하는 정치 지망생은 77명중 30명 내외.
과거 공화당 적을 가졌던 의원만도 28명이고 그중 13명이 당 사무국 출신이다.
게다가 전직 고위 관료 출신을 합치면 정치 이외에 다른 길을 선택하기가 어려운 사람이 대부분이며 그 중 상당수는 공화당·공천 경쟁에서 탈락해 구제「케이스」로 유정회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들을 대표하는 최영희 의장은 어차피 유정회는 사라질 단체이고 남은 기간 공화당이 표를 모으는데 적극 기여할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정책 개발을 통해 공화당의「머리」가 되어 주고 그로 인해 공화당이 인기를 만회한다면 공천의 기회가 주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 의장은 과거 공화당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균 30∼40%의 공천자를 경질한 사례를 들어 30여명 전원이 공화당 공천을 받을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으나 공화당 쪽에서는 잘해야 10명 내외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본 김종필 총재가 유정회 의원들의 개별 능력과 범여권의 단합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데 반해 공화당 소속 의원들 상당수가 배타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정치 지망생들은 현재 개별 연줄로 김 총재와 공화당 중진들을 찾아다니며 발붙일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 입당은 공화당이 원하지 않고 있어 전당대회 후 대통령 선거 대책 기구가 발족할 무렵 일괄 입당이 될 것 같다.
김세배 (아산) 이해원 (제천) 이도환 (마산) 이종률 (남원) 조병규 (사천) 이승윤 (인천) 김윤환 (선산) 신철균 (춘천) 오준석 (울진) 의원 등이 어떤 조건 하에서도 출마할 것을 선언했고 최영희 (평택) 김주인 (거제)전부일 (광주) 이경호 (광양) 김용호(광산) 장기선 (연기) 전정구(무주)윤식 (대구) 고재필 (담양) 백수동(금제) 신상철 (공주) 이성근 (청원) 이정직 (영광) 조홍내· 조일제 (이상 함안) 이상익 (서천) 김영수 (폐산) 윤인직 (함평) 정병학 (대덕) 김영광(평택) 통우량 (예천) 김종하 (종해) 의원 등은 생각은 있으나 아직 결심을 못하고 선거법 협상 결과와 정국의 추이를 관망하는 형편이다.

<착잡한 공화당과의 관계>
출마를 결심한 사람들의 고민은 유권자들의「유신」에 대한 반동 심리가 어떤 심판을 내릴지 알 수 없는 것과 야당이「유신」을 정치 공세의 대상으로 공격해 올 때 자칫 감정적 표적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농촌 등 지역에 따라서는 시간이 좀 지나면 유정회 의원이었다는 것이 도움은 안될망정 턱없이「마이너스」요인만은 아닐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고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다시 냉정을 되찾으면 결국 각자의 개인 능력이 판가름 할 것이며 생판 신인보다는 유리할 것이라는 전망을 하는 측도 있다.
그러나 공화당 쪽에서는『지역에 연고가 있다는 것과 득표 기반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고 또 온상에서 자란 유정회 의원들이 진흙탕 속에서 과연 몇 명이 살아 남을 것인가』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당선 가능한 사람은 다섯 손가락 내외일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한편 유정회 의원직을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하거나 아예 다른 전문 직업을 찾아 나설 사람들은 정치 지망 동료들의 지나친 공화당 편향을 비판하고 있다.
신범직·송방용 의원 등은 시리에 편승한 일부 의원들이 어렵게 헌정을 이어가는 난국의 본질을 외면하고 개헌안 작성 과정 등에서 무분별하게 공화당에 휩쓸려 과도정부의 정치 일정 추진에 차잘을 초래한다는 의견이다.
이들의 주장은 통대에서 선출된 유정회 의원들이라면 남은 기간이나마 당연히 최규하 대통령을 도와 자칫 우리의 안보 현실을 경시하는 듯한 세파에「브레이크」를 걸고 고 박정희 대통령의 유업을 좋은 측면에서 계승, 발전시키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 참모 진서 격려>
이들에 의해 통대 존속 문제가 한때 여권에 제기됐으나 결말은 한번 거론했다는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그칠 것 같다.
이들에게는 최 대통령의 격려와 청와대 참모진을 통한 끈덕진 설득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정국의 안정에 기여하는 것을 최대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서 정부와 공화당간에 균열이 생기면 야당은 좋아하고 국민은 불안해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수적으로는 그리 많지 않다.
전직 변호사 등 전문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비교적 동요가 없으나 학자·언론계 출신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하다는 게 솔직한 고백.
모 교수 출신 의원이 사석에서 김왕길 문교 장관에게 학계 복귀를 희망했다가 냉담한 반응을 받았다든지, 대학가에 어용 교수 시비가 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올 때마다 관계자들은 비감에 잠긴다.
앞으로 새 헌법이 확정되고 정치 바람이 계엄령의 울타리 밖으로 퍼져 나올 때 유정회에는 적자생존의 거센 파도가 밀려올 것 같다. <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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