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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대장장이 … '40년 외길 삶' 박물관 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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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40년간 한 우물을 판 경북 상주지역 11명의 인생이 박물관에 모였다. 지난 15일 상주박물관에서 태극사진관 주인 이창희(67·맨 오른쪽)씨가 오래된 대형 카메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북문농기구 홍영두(68)씨는 지금도 쇠를 달구는 화덕 대장간에서 낫·호미를 만든다. [프리랜서 공정식]

경북 상주시 낙동북부동물병원 장국진(70) 원장은 지금까지 40년간 소만 상대한 수의사다. 전문분야는 암소의 임신 감정이다. 그는 초보 수의사 때 임신으로 신경이 예민해진 암소 뒷발에 걷어차이기도 했다. 오른쪽 무릎을 다쳐 두 차례 수술했다. 소의 임신 상태는 직장(直腸)으로 손을 넣어 감정한다. 팔이 항문 안으로 거의 다 들어가야 탯줄까지 닿는다. 탯줄을 만져 보고 그 굵기로 임신 여부 등을 판단한다.

 암소는 임신 기간에 따라 최고 150만원까지 값에 차이가 난다. 소를 사고 파는 농민들에게 임신 감정은 그래서 중요하다. 문제는 감정 때 소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이다. 팔이 직장에 들어간 상태서 소가 움직이면 팔이 부러질 수도 있다. 소가 이상행동 조짐을 보이면 재빨리 팔을 빼야 한다. 지금까지 다행히 그런 사고는 없었다.

 장 원장은 경북대 수의학과를 졸업했지만 소 임신 감정은 독학으로 터득했다. 우시장에서 암소를 사고 팔 때 수의사를 불러 임신을 감정하는 걸 보고 어깨너머로 배웠다. 처음엔 판정을 잘못해 ‘돌팔이’란 소리도 들었다. 이젠 도사가 됐다. 그는 “요즘 젊은 수의사들이 주로 쓰는 초음파보다 더 정확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가 감정한 암소는 15만 마리를 넘는다. 경북지역 웬만한 우시장은 장원장을 불러 소 임신감정을 맡기고 있다.

 장 원장의 40년 인생을 박물관에서 보게 됐다. 상주박물관은 지역에서 40년 이상 한 가지 일에 매달린 11명의 삶을 담은 특별전(한평생 외길 인생)을 열고 있다. 전시 기간은 9월 21일까지다. 박물관이 살아 있는 이웃의 이야기를 전시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주인공은 장 원장 이외에 북문농기구 홍영두, 태극사진관 이창희, 옥산석재 서두석, 백재정미소 김정원, 상주토기 정학봉, 상서문세탁소 김영무, 신성이용소 김성희, 국제라사 이장복, 남산자전거 김수길, 제일양화점 양근수씨 등이다.

 박물관은 이들이 사용한 카메라·자전거 등 도구와 사진·육성 등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일하는 모습이 담긴 그림(스케치)도 있다. 특별전을 기획한 김연남(34) 학예사는 “박물관이 단순한 유물만 전시하는 시대는 지났다”며 “사람을 통한 지역의 역사를 보여 주고 싶었다”고 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일터로 주인공을 찾아가는 관람객도 있다. 북문농기구 홍영두(67)씨는 지금도 쇠를 달구는 화덕 대장간에서 낫·호미 등을 만든다. 홍씨는 “한동안 대장간 제품이 값싼 중국산에 밀렸는데 중국산이 형편없는 걸 안 사람들이 다시 찾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물의 주인공이 박물관을 찾아오기도 한다. 지난 15일엔 태극사진관 이창희(67)씨 부자가 들렀다. 이씨는 “전시가 시작된 뒤 격려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았다”며 “외길 인생이 인정받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관람객 강태의(32·상주시 계산동)씨는 이씨에게 “전시된 카메라가 작동하냐”고 물었다. 80대 고령인 남산자전거 김수길씨와 제일양화점 양근수씨는 전시회가 열리기 얼마 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상주박물관 전옥년(58) 관장은 “평범한 사람도 한 길을 걸으면 박물관에 전시될 수 있음을 알리고 싶다”며 “젊은 사람에게는 직업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주=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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