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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전육참총장 군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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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사안의 진상
이건에 있어서는 무엇이 진실인가, 공판진행과정에서 밝혀진 사안의 진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이건 공소사실에 의하면 피고인이 1979·10·26 대통령시해사건의 범인이 김재규임을 알게된때는 같은 날 20시20분께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전화로 부대이상유무를 확인한 연후라고 되어있는바 피고인의 변소에 의하면 같은 날 23시30분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으로부터 『각하를 시해한 범인이 김재규이다』 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각하 시해 범인을 알게되었다하는 것입니다.
(2) 이건 공소사실에 있어서 김재규의 내란행위에 대한 구체적 방조행위로서 들고있는 여러가지 사실에 대하여 본 변호인은 검찰관과는 다른 평가를 하고싶습니다.
가, 20시25분경 「벙커」 총장실에서 피고인이 김재규에게 군수뇌 소집사실 및 병력출동상황을 얘기한 것과 계엄군점령목표를 물어본것은 당시 「벙커」내에는 정부 각료급으로는 김재규가 유일한 사람이었고 또한 중앙정보부장의 위치는 국가안보와 매우 긴밀한 연관이 있는 직위로서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육군참모총장이 그러한 일이라면 당연히 정보부장과 상의할수있는 사항이고 또 그게 잘못된것은 절대 아니라고 보아집니다. 따라서 보고라는말을 쓴 공소사실 내용은 협의라는 말로 표현함이 온당하다고 봅니다.
나, 피고인이 그날 20시30분경 당시 국방장관 노재현에게 그간의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지 못한 것은 피고인이 장관에게 보고한 이상의 상황을 더 알지도 못했었고 또 국방장관과는 더 이상 얘기할 틈이나 경황이 없었으며 서로의 임무때문에 만날수도 없었고 피고인보다는 김재규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을것이므로 김재규에게 상세한 것을 물어보라고 한것에 불과했던 것이지 김재규의 범행을 일부러 은폐하기 위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고 피고인은 변소하고있읍니다.
어찌 김재규 범행 은폐의 수단이 그 정도에 그칠 수 있었겠읍니까.
다, 공소사실은 20시40분경 피고인이 당시 수경사령관에게 청와대 원거리포위를 지시하고 21시경에는 당시 경호실 차장에게 경호실 병력 철저 단속과 수경사령관과의 협조지시를 한것은 김재규의 신변을 보호할 의도로 대통령시해범인 체포를 위한 청와대경호실의 출동을 저지키위한 것이라고 되어 있는바 사실 당시 피고인은 대통령시해가 청와대내부의 소행으로 의심하였기 때문에 청와대에서 외부로의 탈출 내지는 외부와의 연결을 단절키위한 것이고 또한 경호실 차장으로 하여금 경호실 병력을 철저히 단속케하여 병력들의 경거망동이나 층돌 특히 원거리 포위한 수경사병력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막기 위한 조처에 불과한것으로 만약 피고인이 김재규의 신변을 보호할 생각이 있다면 「벙커」내의 안전한곳에 피신케하고 육본병력으로 주위를 경호케할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바 공소사실대로라면 너무 허술한 신변보호책이 아닌지 모르겠읍니다.
라, 21시20분경 이미 출동 지시한 병력의 출동 중지명령을 내린것은 갑작스러운 군 병력이 시내에 진입하게되면 국민들이 놀라 동요하게되어 치안유지가 곤란하게 되므로 이를 통금시간 이후로 미룬것이며 당시는 군부대에는 큰 문제점이 없다고 판단된 장황이므로 병력출동을 서두를 필요도 없었고 다만 이동시간조정을 한것에 불과합니다.
마, 23시30분경 김계원으로 부터 김재규가 범인임을 제보 받고 국방장관이 피고인에게 체포지시를 하므로 하는 수 없이 김재규의 신병을 확보하되 사태추이를 계속 살펴보기로 하였다고 공소사실은 되어있는바 사실은 국방장관과 피고인이 그러한 말을 같이듣게 되자 두 사람 모두 깜짝놀라 눈이 서로 마주쳤으며 같이 잡자는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동시에 생겨 함께 벌떡 일어나 피고인이 직접 체프지시를 하기위하여 곧장 육본「벙커」로 내려와 헌병감을 불러 체포지시를 한것이라고 피고인은 변소하고있고 다음 공소사실에는 피고인이 보안사령관에게 김재규를 시내에있는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 지시했다고 하는데 이점도 사실과는 다르다고 피고인은 변소하고 있읍니다. 피고인이 김재규를 정중히 모시라는 말을 한일이 전혀없고 다만 조심해 다루라는 의미의 표현을 한 사실은 있다고 합니다.
나아가 체프지시에는 당연히 수사관에 의한 조사활동이 뒤따르는 것까지 감안한 것임은 우리의 경험직상 너무도 당연하므로 체포만 지시하고 조사지시는 하지않음으로써 방조하였다는것은 지나친 억지에 불과합니다.
◇피고인은 무죄
(1)피고인에 대한 이건 공소사실은 피고인이 내란목적 살인의 범인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고 있었음을 전제로 하여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안의 진장이 이상과 같을진대, 그렇다면 피고인은 무죄입니다. 원래방조범이라는 본범에 대한고의와 방조의 고의가 있어야 하는바 본건의 경우 본범의 고의라함은 본범인 김재규가 내란행위(내란수괴 및 내란목적살인)를 한다는데 대한 인식을 말하며 방조의 고의라함은 피고인이 김재규의 내란행위를 방조한다는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피고인이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 범인임을 알게된 시간은 10월26일23시30분경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이 피고인 및 당시 국방부장관 노재현에게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인임을 알려준 그때이며 피고인은 그 즉시 당시헌병 보안사령관에게 김재규를 체포하여 수용하라고 지시한 것이 분명하므로 피고인은 본범의 고의와 방조의 고의가 없었다 할것이며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공소장에 적시한 공소사실이 다소 사실과 다른점이 있을뿐만 아니라(공소사실1과5) 또한 달리 평가가 된다면 그러한 사실만으로는 방조행위로 의율할수 없음은 물론이며 나아가 이를 인정할 증거조차 없다할 것이므로 피고인의 이건 소위는 범죄의 증명 없음에 돌아가 무죄를 선고함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2)이건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은 내란방조로 되어있는바 그 본범으로 되어있는 김재규등의 내란 수괴 및 내란목적 살인등 범행은 형법 제87조의 내란행위가 아니라 단순한 살인행위에 불과하다고 보므로 따라서 공법종속성에 의하여 피고인의 이건 소위로 내란방조가 될수 없다할 것입니다.
이 군법회의는 국방부 고등 군법회의 및 대법원의 판결에는 기속 받는다 할 것이나 이 군법회의와는 하등의 상하급 심의관계가 없는 육군고등군법회의 및 육본보통군법회의의 판결에는 전혀 기속받을바 없다할것이므로 이 군법회의에서는 독자적 판단에 의하여 이 건의 본범의 소위가 내란행위인지 여부를 명확히 판단해 주실것을 바랍니다.
(3)내란죄에는 공범으로서의 종범이 있을수없읍니다.
즉 형법 제에는 공범형 특히 동법 제32조의 규정이 적용될수 없다고 봅니다.
⑷가사 피고인이 당시 여러가지 상황 판단을 잘못하므로 인하여 김재규가 대통령시해범인임을 알지 못했으나 만약 주의하여 범인을 알아내려고 노력하였다면 즉각 알수 있었음에도 이를 게을리 한결과 김재규의 내란행위를 방조했다고 한다면 피고인은 과실에 의한 내란 방조가될 것입니다.
이러한 추궁을 감수한다하더라도 그러나 과실에 의한 내란방조를 처벌하지 않는 우리 현행형법의 입장에서는 경범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결과만 가지고는 결코 처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점에서도 피고인은 무죄입니다.
◇정상론
이상에서 살펴본바에 의하면 피고인에 대한 이건공소사실은 죄가 되지 않거나 또는 범죄사실의 증명없음에 귀착되므로 피고인에 대하여는 무죄가 마땅히 선고되어야 할것이나, 만약 이 군법 회의가 피고인에 대하여 유죄라는 결론을 내리게된다면 다음의 몇 가지 점이 그 정상으로 반드시 참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1)피고인의 이건 범죄는 형법 제26조의 중지미수입니다. 피고인은 경범인 김재규를 체포함으로써 김재규의 내위를 미수에 그치게 하였고 피고인은 그 스스로 방조행위를 중지한 것이므로 내란방조의 중지미수가 된다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중지미수의 이론이 방조범의 경우에도 적용되어야 할것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만 통설의 입장이 이를 인정하고자하며 또 당연히 실익도 크다 할것입니다.
이건 본범의 의도하바가 어떤 것이었든 조기에 체포함으로 인하여 더 이상의 나라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 할 수 있었고 북괴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피고인에게 실사 유죄가 인정된다 할지라도 당연히 형면제의 판결이 선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⑵국가의 안보와 민주화의길 10·26사태 당시 피고인이 취한 일련의 조치는 국가의 안위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하여는 최선의 조치였읍니다.
피고인은 진정한 군인으로 10·26 사태라는 국가의 안위에 직결되는 상황이 터지자 먼저 북괴의 도발을 걱정하였고 국내의 소요로 인한 내란의 위험을 생각하였읍니다.
그래서 남보다 먼저 정확한 상황판단과 이에 대응한 조치를 강구하였으며 육군참모총장으로서의 책임이 막중합을 알아 침착하고 예리하게 사태수습의 길을 모색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피고인의 마음가짐은 10·26이후 피고인이 계엄사령관이 되어 치안과 국방의 실질적 책임자가되고 부터는 더욱더 확고하게 나타났습니다. 주지하시는 바와같이 계엄사령관과 육군참무총장으로서 모든일은 적법절차에 따라 처리할 것을 천명하였그 군은 경치에 엄정중립하여 소임을 다하고 질서가 회복되고 나라가 안정되면 가장 빠른시간안에 군본연의 임무에 복귀할것을 선언하였읍니다.
만약 당시 피고인의 이와같은 적절한 조처가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었는지 매우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읍니다.
항상 도발의 위험을 안고있는 북괴를 지척에 두고 당시 너무나 어수선하였던 국내의 정정과 이 나라의 강력한 구심점이었던 대통령각하를 졸지에 잃은 당시의 우리 형편은 누가 강조하지 않더라도 그야말로 혼란의 위기였읍니다.
이러한때에 냉철하고 침착하게 사태수습에 나설수있고 준법정신을 강조하는 참 군인을 참모 총장 및 계엄사령관으로 모실 수 있었다는 점에 우리는 오늘에 있어서도 다행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읍니다.
이러한 점은 당시 대부분의 국민이 피고인의 조처에 최대의 찬사와 격려를 보냈던 사실을 상기해보면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신체제하에서 억눌린 인권을 무수히 보아왔고 국민의 잠 자유와 나라의 진정한 민주화를 갈망하는 국민의 여망을 잘 알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피고인은 다만 정치발전 내지는 민주발전을 위하여 최대한의 분위기조성과 민주정치의 무대를 만드는 여건조성에 조그만 노력도 아끼지 않았읍니다.
10·26이후 우리들이 보아온 그대로 입니다.
모두 활기에 차고 희망에 넘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피고인 자신은 어떤 정치적 욕심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우리 국민모두가 안심하고 자유롭게 살며 민주정부가 적법절차에 따라 국민여망에 맞게 세워질것을 바랐을 뿐이었읍니다.
10·26이후의 우리주위의 수많은 변화는 모두 피고인에 힘입은바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며 이나라 민주화와 국가안보 및 질서유지에 기여한 피고인의 공은 길이 기억될것입니다.
⑶피고인의 걸어온 길 피고인은 들로 태어나 공비의 만행에 분노하여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이래 6·25동란때는 유명한 백골부대 대대장으로서 사선을 넘나들기 한두번이 아니며 휴전이 될때까지 세운 전공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한번도 최전선을 떠나본적이없는 오직 군인으로서의 길만 걸어온 사람입니다.
제복을 입은지 어언 32년6개월, 피고인은 전략전 술 부문에 있어서 가히 독보적인 지위라 할 정도로 지장 있었고 또한 부하를 아끼는 덕장으로 소문나 있습니다. 여기서 국가와 군에 기여한 그 공을 일일이 들추어 내는 것은 오히려 피고인을 민망하게할 뿐입니다. 본 변호인의 입은 너무 짧고 인간 됨됨이와 그의 신념을 말로 표현할수 없읍니다.
우리가 이때까지 보아온 그대로인 것만을 말씀드립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노병을 죽게하지 않고 근대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떻든 오늘·우리는 여기에서 인간 정승화에 대한 가장 타당한 평가를 내려야 합 것입니다.
1980.3.11
피고인의 국선 변호인 변호사 여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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