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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춘향전』의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2주일쯤 지나니 장마가 시작됐다. 활기가 넘치던 촬영장은 잠시 잠잠해졌고 50여명의 촬영 「팀」은 따분한 나날을 보냈다. 이러던중「스태프」들에게 월급을 줄 날이 되었다. 영화사에서 함께 온 경리책임자 안종덕은 돈 줄 생각을 않고있었다. 나는 은근히 그를 불러 『어떻게 된 셈이냐』고 물었다. 안종덕은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금이 바닥났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춘향부』은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결국 안종덕은 급히 서울로 올라가 전주 김재중에게서 다시 돈을 마련해 왔다. 그 돈은 고리대금이었다.
제작비의 압박을 받기 시작하면서 나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그럭저럭 장마가 개고 밤촬영이 시작됐다. 이게 또 어떻게 된 일인가. 칠흑같은 어두운 밤에 눈부신 「라이트」를 일시에 켜니. 어디서 몰려왔는지 수많은 하루살이와 각종 나방들이 촬영장을 뒤덮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벌레들을 비집고 도저히 촬영기를 돌릴 수가 없었다. 이튿날은 살충제를 뿌려 보았지만 신통하질 못했다. 나는「세트」장 주변을 통째로 모기장을 둘러칠까도 생각해 봤으나 그것은 실현성이 없었다. 자금에 시달리고, 하루살이에 시달러 50여명의 촬영 「팀」은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배우 숙소에 밥을 나르던 마을의 한 중년 부인이 헐레벌떡 감독 숙소로 뛰어들어왔다. 그리고는 『아이고! 춘향이가 죽었어요』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 여인의 설명에 따르면, 춘향(조미령)의 남편인 이철혁이, 춘향을 목침으로 내리쳐 춘향이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나와 조감독인 명현목 하한수 정일택 최훈등은 우르르 여배우 숙소로 달려갔다.
가보니, 석금성이 새파랗게 질린채 까무러쳐 있는 조미령을 안고 있었고, 한은진은 까무러친 조미령의 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사연인즉, 이철혁이 평소 약간 의처증이 있었는데, 촬영하는 동안 이도령인 이민과 가까와지지 않았나 하고 의심해왔던 것이 그날 폭발, 부문곡절하고 목침으로 조미령을 내리친 것이었다. 그 목침이 뒷머리를 정통으로 맞춰 조미령은 까딱했으면 죽을뻔 했다. 여러사람의 간호로 조미령은 한참뒤에야 깨어났다.
가창면 냉천동에서 촬영을 마친 촬영 「팀」은 경주를 거쳐 밀양 영남루에서 광한루장면을 마지막으로 촬영을 마쳤다. 임시로 「영남루」 현판을 떼어내고 「광한루」현판을 달고 보니 그럴듯 했다.
7월에 냉천동에 내려가 9월 중순이 되어서야 촬영을 마치고 상경할 수가 있었다.
서울에 올라오니 그동안 빌어 쓴 고리채가 눈덩이처럼 불어 있었다. 돈을 꾼 김재중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날이면 날마다 빚장이에게 몰려 기진한 상태였다.
나는 더욱 어깨가 무거워졌다. 빨리 완성해서 김재중의 빚을 갚아줘야 할터인데, 아직도 상당한 부분을 서울에서 찍어야 해 그 뒷받침이 어떨지 막연할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김재중이 병이나 입원했는데, 중태였다.
전주가 이 모양이 됐으니, 자칫하면 지금까지 찍어놓은 『춘향전』은 공중에 뜰 운명이 되고 말았다.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나의 가슴엔 『춘향전』만은 기필코 훌륭한 대작으로 완성해야된다는 집념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나는 김재중의 동생 김재옥을 찾아가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해서든 완성할 수 있도록 자금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재옥도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터라 크게 걱정했다. 그는 당시 대법원장으로 있던 부친(가인 김병노)에게 말씀드려 마무리짓자고 했다.
그래서 나머지촬영을 가까스로 끝내 녹음과 음악만 넣으면 상영은 할 수 있게됐다.
나는 대법원장관댁의 2층 「다마미」 방에서 편집을 시작했다. 빚장이들에게 김재중의 가족이 얼마나 고초를 당했는지, 나에게 식사를 나르던 가정부까지 식사때마다 『선생념, 이 영화는 언제 상영하나요』하고 묻곤 했다. 가정부생각에도 상영만 하면 금방 돈이 쏟아져 들어오고 빚을 갚을수 있을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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