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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월드컵] 짬뽕축구가 월드컵 먹었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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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우루과이와 16강전은 축구 인생 중 가장 아쉬움이 남는 경기다. 교체 멤버로 벤치에 앉아 있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골든골을 터트린 2002년 한·일월드컵 이탈리아와 16강전처럼 ‘들어가면 골을 넣을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감독님께 말씀 드려볼까 몇 번을 일어났다 앉았다 했지만 결국 포기했고, 팀은 1-2로 졌다. 종료 휘슬이 울린 뒤 ‘이제 죽을 때까지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 없겠구나’란 생각에 눈물을 왈칵 쏟을 뻔 했다.

 2012년 1월 현역 은퇴 후 1년 동안 축구를 보지 않았다. 현역 시절 축구가 너무 힘들었고 지긋지긋했던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하게 방송 해설위원으로 생애 네 번째로 월드컵을 경험하게 됐고, 한 달간 중계를 하며 다시 축구를 사랑하게 됐다. 다비드 비야(33·스페인)가 호주전 눈물의 은퇴경기 후 “대표팀에서 뛸 수 있어 꿈만 같았다. 55세까지 뛰고 싶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도 축구를 버릴 수 없는 사람이구나’고 느꼈다.

 세계축구 흐름과 전술도 배울 수 있어 감사했다. 브라질 월드컵은 ‘짬뽕 전술’이 대세였다. 과거 유럽과 남미의 축구 스타일은 확연히 달랐다. 아르헨티나는 공격은 강하고, 수비는 공격보다는 약했다. 하지만 알레한드로 사베야(60) 감독은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의 탄탄한 수비 전술을 팀에 접목시켜 준우승을 이뤄냈다.

우승팀 독일은 특유의 게겐 프레싱(전방 압박), 스페인의 티키타카(탁구 치듯 짧고 빠른 패스 플레이), 네덜란드의 카운터 펀치 역습을 절묘하게 조화시켰다. 네덜란드와 칠레는 구시대 유물로 불리던 스리백을 한 단계 진화시켰다.

 ‘넘버9’의 퇴조는 예견된 결과였다. 등번호 9는 정통 스트라이커를 상징한다. 프레드(31·브라질)와 곤살로 이과인(27·아르헨티나)은 각각 1골, 디에고 코스타(26·스페인)와 디디에 드로그바(36·코트디부아르)는 무득점에 머물렀다. 카림 벤제마(27·프랑스·3골)와 미로슬라프 클로제(36·독일·2골) 정도만 제 몫을 했다.

대신 하메스 로드리게스(23·콜롬비아·6골), 토마스 뮐러(25·독일·5골), 리오넬 메시(27·아르헨티나·4골)처럼 신개념 포워드들이 득점 1~3위를 차지했다. 이번 대회 가장 두드러진 전술은 압박 후 역습인데, 2선 공격수들이 포지션 파괴와 함께 수비 뒷공간을 파고들어 해결사 역할을 했다. 수비 입장에서는 스타일이 다른 여러 공격수들을 상대하는 느낌이라 곤혹스러웠을 거다. 12년 전 거스 히딩크(68) 한국팀 감독도 내게 정통 스트라이커가 아닌 만능 공격수 역할을 주문했었다.

 이번 대회는 경기당 2.67골이 터졌다. 그럼에도 전설적 골키퍼 야신(러시아)의 후계자들이 대거 등장했다. 팀 하워드(35·미국)는 벨기에와 16강에서 유효슈팅 27개를 막아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척 헤이글 국방장관으로부터 격려 전화를 받았다. 마누엘 노이어(28·독일)는 수시로 페널티 지역 밖까지 나와 볼을 걷어내 ‘스위퍼형 골키퍼’란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한국은 골키퍼가 필드 플레이어와 함께 훈련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 공격의 시발점인 킥력과 수비 능력을 겸비한 ‘완전체 골키퍼’를 키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아시아 국가의 몰락은 아쉽다. 아시아 4개국은 24년 만에 본선에서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월드컵 아시아 출전 쿼터 4.5장이 줄어들까 걱정이다. 한국은 유럽 전술을 가져와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솔직히 선수들 기량이 세계와 분명히 격차가 있다. 이영표 KBS 해설위원이 “월드컵은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증명하는 자리다”고 말했는데, 증명할 실력이 있어야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증명할 단계까지 못 왔으니 경험이란 단어가 맞다고 본다. 느끼고 발전해야 한다.

  국내에서 뛰든 해외에서 뛰든 관계없다. 소속팀에서 인정받는 것보다 국가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건 어떨까. 난 이탈리아 페루자 시절 대표팀을 생각하며 사비로 훈련장을 통째로 빌린 적도 있다. 훈련장 관리인에게 밥값·담뱃값을 쥐어주고 해질녘까지 홀로 훈련을 했다.

 하비에르 마스체라노(30·아르헨티나)는 귀감이 될 만하다. 네덜란드와 4강에서 헤딩 충돌 후 뇌진탕 증세를 보였지만 곧바로 그라운드에 돌아와 승리를 이끌었다. “인생을 걸었다”는 명언도 남겼다.

독일과 결승에서 패했지만, 전쟁영화에서 동료들을 다 구한 뒤 마지막에 홀로 죽는 주인공 같았다.

리우 데 자네이루=안정환 중앙일보 해설위원

[사진 AP=뉴시스, 로이터=뉴스1]

사진 설명

①수아레스 조심, 또 사람 물면 벌금 52억원 ‘핵 이빨’ 수아레스를 풍자해 드라큘라 입 모양으로 만든 마우스피스. 새 소속팀 바르셀로나와의 계약서에 따르면 수아레스가 또 사람을 물면 벌금 52억원이다.

② 샛별인 줄 알았더니 몸값 622억원 득점왕(6골)에 오른 콜롬비아 로드리게스. 샛별인 줄 알았더니 이미 몸값 622억원의 귀하신 몸.

③ 꼭꼭 숨어라, 수니가 플라잉 니킥을 네이마르에게 시도한 콜롬비아 수니가. 그는 현재 브라질 마피아를 피해 은둔 중.

④ 손흥민 눈물은 아시아의 눈물 손흥민의 눈물은 아시아 축구의 눈물. 한국·일본·호주·이란 4개국은 3무9패 로 세계의 벽 절감.

⑤ 금의환향 독일 월드컵을 제패한 독일 대표팀이 15일 금의환향했다. 베를린 테겔 공항부터 독일 통일 상징 브란덴부르크문까지 수십 만의 인파 속에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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