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적 자유화의 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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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12월3일 중공의 북경시 당국은 한동안 허용되었던 이른바 「민주의 벽」을 폐쇄조치했다. 외신에 의하면 중공의 경찰관들은 일부 항의하는 시민들을 강제 해산하면서 이 조치를 비난하는 마지막 벽신문을 철거시켰다 한다. 이것으로 사인조 실각 이후 등장했던 「민주의 벽」이란 이름의 『한 해빙현상』이 북경거리에서 자취를 감춘 셈이다.
중공 당국은 폐쇄조치의 이유로 불순요소의 편승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기본적으로 『북경적 해빙』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밖에 없겠다.
등소평을 비롯한 반 모택동계 구간부들은 지난 76년 사인조를 타도한 직후 자체의 권력을 집고화하기 위해 지식인 및 대중들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10여년간 사인조의 극좌적 억압정책 하에서 혹심한 고통과 궁핍을 강요당하고 있었던 만큼 그 불만세력의 「입」을 열어놓는다는 것은 곧 구간부들의 대 사인조 투쟁에 유리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북경거리 일각에 설치된 「민주의 벽」이란 바로 그런 필요에서 연출된 정치적 「해프닝」의 장이었으며 그 중구난방에 가탁해서 등일파는 사인조 세력 거세에 박차를 가해왔다.
그러나 일정한 단계에 이르자 이「해프닝」은 등일파의 「컨트롤」을 벗어나는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고, 때로는 등권력과 당독재 내지 공산주의 자체에 도전하는 사례까지 튀어나오게 되었다.
벽신문 가운데는 자유중국 경제의 우월성을 칭송하는 것도 있었고, 서구식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것, 중공 당국의 인권탄압과 당독재 원칙을 비난하는 것도 눈에 띄었다.
지식인이나 대중 사이에는 『탐삭』이니 『성채』니 하는 반권력 신문이 나돌았고, 천안문 광장에는 지방농민과 실업자들의 시위가 끊일 날이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오랫동안 억눌려있던 중공지식인과 대중들의 불만이 단순한 사인조 반대에서 점차 당독재 반대로 확대되고, 나아가선 공산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수준에 까지 이를 수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중공당국은 사법제도를 명문화하고, 시선거를 비밀투표제로 바꾸는 등 몇 가지 제도개혁을 단행하는 방식에 의해 불만을 해소해보려 했지만 이미 거세진 대중의 요구는 거기서 제동 당하려 하지 않았다.
사인조에 대한 권력투쟁의 필요에서, 그리고 『4개의 현대화』를 수행하기 위한 객관적인 필요에서 일부 도입된 체제완화조치는 결국 공산권력 자체의 동요를 수반하게 된 것이다.
이 위기에 대해 화·등일파는 다시 구태 의연한 억압강화와 수구적인 체제경직화로 미봉하려 하지만, 중공 내지 모든 공산권력들이 직면한 기본적인 체제적 위기는 이런 미봉책으로써는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중공을 비롯한 모든 공산국들은 이제 경제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공산독재를 완화하느냐, 아니면 독재권력을 놓치기 싫어 경제침체를 감수하느냐의 택일에 직면해 있다. 후자의견을 택할 경우, 모순과 위기는 오히려 더 내재화·심화될 것이며 권력과 주민사이의 단절과 대립은 더욱더 격화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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