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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향에 묻혀 정든 청와대 떠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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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잘 가십시오』-. 고 박정희대통령의 국장일인 3일 청와대에서 국립묘지에 이르는 연도에는 2백여만 명의 시민등이 나와 고인의 마지막 길을 보냈다. 18년5개월동안 나라를 이끈 지도자를 잃은 국민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안개가 자욱이 깔린 서울거리에는 소복을 곱게 차려입은 칠순할머니에서부터 철부지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이날만은 미움과 노여움을 버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청와대∼중앙청
3백여m에 이르는 장의행렬이 이날 상오9시25분 청와대 문을 나서자 이른 아침부터 연도를 메웠던 시민들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영구차는 전후 40명씩, 좌우 10명씩의 3군사관생도 1백 명이 앞뒤에서 이끌었으며 그 뒤에 친족대표 10명·최규하 장의위원장등 추모제에 참석했던 장의위 일행· 친척·청와대비서실·경호실 간부의 순서로 영결식장인 중앙청으로 향했다.
장의행렬이 지나는 청와대 본관에서부터 정문까지는 1백 명의 3군 사관생도가 길 양쪽에 앞에총자세로 도열했다. 정문부터 삼청동까지는 비서실·경호실 직원 5백여 명이 검은 옷에 흰 장갑차림으로 서서 떠나는 박대통령을 배웅하며 흐느꼈다.
상오 9시l5분 박대통령의 영구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평소 박대통령을 가까이 볼 수 있었던 주방직원·청소부 아주머니들이 통곡을 터뜨려 또 한 차례 흐느낌의 파도를 일으켰다.
영구가 청와대 정문을 나서서부터 영결식장에 이르는 동안 박대통령의 나이수대로 62발의 조포가 경복궁 안에서 울렸다.
영구차 앞 영정을 모신 선도차에 탄 친족대표 박재석씨는 시종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연도에서 마지막 배웅을 한 청와대비서실·경호실 직원들의 슬픔을 더 북받치게 했다.
청와대주변은 이날 아침 자욱한 안개로 뒤덮였고 「아스팔트」위에는 낙엽이 흩날려 대통령을 잃은 슬픔을 더해주었다.
부산에서 올라온 박점순씨(66·여·대한적십자사부산지사봉사대원·부산시 중동l368)는 오른손에 성경·왼손에 고 육영수 여사와 같이 찍은 사진을 꼭 쥐고 『국민을 그토록 사랑하시더니…』라며 목이 메었다.
장의행렬
서울 세종로 가로변에는 20m간격으로 태극기가 걸렸고 3백여 개의 확성기에선 『태산이 무너진 듯, 강물이 갈라진듯…』 조가가 계속 울려퍼져 애도의 분위기를 더했다.
낮12시쯤 중앙청 정문인 광화문 밖으로 경찰「사이카」3대의 선도로 운구행렬이 움직였다.
운구행렬은 「사이카」3대, 선도차, 초상화를 모신 무개「지프」. 3군 군악대로 이뤄진 군악대, 3군의장대, 여군30명이 대형 태극기를 받쳐든 국기봉대단과 영정·훈장을 받든 무개「세단」. 고박정희 대통령을 모신 흰색·노란색·빨간색 국화 7만2천 송이로 장식된 영구차와 이를 호위하는 1백여 명의 3군 사관생도들이 구슬피 울려퍼지는 조악과 연도시민들의 눈물의 전송을 받으며 서서히 남쪽으로 움직였다. 장의차 위에는 유족·장의위원장·친족·고문·장의위원들이 서울역 앞까지 걸어서 따랐다.
초상화 정형모씨 작
고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운구행렬 중 선도 무개차에 부착한 박대통령의 초상화는 정형모씨(초상화 전문작가)에 의해 제작됐다.
정씨는 지난번 영부인의 초상화를 자진해서 제작한데 이어 이번에도 자진 제작했다고 김성진 문공장관이 밝혔다.
행렬이 대형「아치」와 천연색영정이 설치된 광화문네거리를 지나자 일대는 오열하는 시민들의 울음으로 메워졌고 세종로 중앙분리대에 장식된 국학꽃들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듯 고개를 숙였다.
상오4시10분에 소복차림으로 집을 나와 5시쯤 광화문에 도착한 장선옥씨(56·여·서울신당5동107의l)는 『마지막 가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새벽5시30분쯤 광화문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연도
18년 전 5·16 새벽 혁명군을 이끌고 박대통령이 처음으로 국민앞에 그 모습을 나타냈던 시청 앞 광장을 이제 고인이 돼 영구차에 실려가고 그 뒤를 유족들이 뒤따르는 모습에서 시민들은 더욱 비통함을 느낀 듯 유족들이 앞을 지나갈 때 목놓아 울었다.
덕수궁 모퉁이에서는 조양종 총무국장 이청우 스님(36)의 인솔로 30여 명의 스님들이 나와 목탁을 두드리며 『나무아비타불』을 부르며 고인의 명복을 비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보문사에서 왔다는 김인흥 스님(22)은 『박대통령의 49재를 모시는 중』이라며 『이승의 영욕과 명리를 떠나 극락에서 왕생하시길 빈다』고 눈물을 글썽했다.
애도객들 가운데는 과거 대통령선거에 출마, 박대통령과 겨루기도 했던 정의당 당수 진복기씨(57)가 『중앙청 영결식에 초대받아 가는길이었는데 차가 막혀 늦었다』며 시민들 틈에 섞여 「카이저」수염을 쓰다듬으며 영구행렬을 지켜봤다.
국립묘지
고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발걸음이 멈추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3일 새벽5시부터 시민들이 몰려 낮12시까지 2만여 명이 국립묘지 동문을 통해 입장, 묘지정문 맞은편에서 올려다보이는 유택을 지켰다.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서울 오류동에서 전철을 타고 노량진역에 내려 새벽5시쯤 국립묘지에 도착한 김간난 할머니(80)는 동문이 열린 상오9시까지 4시간 동안이나 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다 첫 번째로 입장햇다.
고 박정히 대통령이 71년 유세도중 전남 고흥군 단원면에 들러 악수를 하는 모습이 각 신문에 보도됐던 신윤철옹(75)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신문과 사진을 들고 나와 박대통령의 유해뒤를 따르며 통곡했다.
박정희 대통령 유택 따뜻한 분위기 강조|설계자의 말
고 박정희 대통령의 유택은 『전체적으로 따뜻한 분위기』를 강조했다는 것이 설계자 이만영씨(55·남산미술원 대표)의 말이다.
이씨는 『생전에는 엄정·강직한 분이었으나 묘소는 따뜻한 정이 넘치도록 돌보다는 잔디를 많이 썼으며 계단입구에도 호상(호상)대신 식등(석등)을 세우기로 했다』고 말했다.
육여사 묘소도 설계했던 이씨는 『대통령의 묘소까지 설계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애통해 했다.
국가원수급은 60평까지 묘역을 쓸 수 있으나 박대통령의 유택은 근검절약을 강조한 고인의 유지에 따라 육여사 묘역과 합쳐 60평으로 설계했다.
차 양 옆에 대형유리|밖에서 영구보게
영구차
박정희 대통령의 유해를 청와대로부터 장지까지 운구한 영구차는 장의집행위원회가 새한자동차에 의뢰해 특별히 제작한 대형「버스」.
차체길이 10.15m, 폭 2.5m, 높이 3.1m의 영구차 바닥엔 붉은 「카피트」가 깔렸고 천장에는 6개의 실내조명등이 달렸으며 차체 중심부엔 가로 3m, 새로 l.5m, 두께 5㎜의 특수유리를 부착, 그 안에 대형태극기에 덮인 관을 안치하여 연도에 나온 많은 조문시민들도 이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관대유리문 위쪽에는 대통령문장 봉황이 붙여져 있었고 그 아래엔 무궁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영구차는 노면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보통「버스」보다 차체를 훨씬 낮췄으며 관대전면과 양후면에는 좌석을 만들어 11명의 유족들이 탔고 흰색지붕을 비롯, 차체 바깥에는 마산에서 공수된 흰 국화 1만2천송이, 노란국화 2만송이, 빨간국화 4만송이로 감쌌으며 차체중앙상단으로부터 양쪽으로 검은「리번」이 팔자형으로 쳐져있었다.
영결식장 현장감독 국가최고회의 시절 박대통령모신 병장
연8백여명의 인부를 독려하며 밤을 밝혀 중앙청영결식장을 꾸민 현장감독 이종섭씨(43)는 영결식이 무사히 끝난 뒤 『5·16 당시육군병장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사과에서 박대통령을 가까이 모셨는데 이제 대통령의 영길식장을 꾸미게 됐으니…』하고 울먹였다.
영구차 꽃 장식업자 육여사 때도 꽃 장식
영구차 운전을 맡은 새한자동차 조예준씨(38)는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모시게되어 영광스러우나 편히 모셨는지 걱정된다』고 말했고 영구차 꽃 장식을 맡았던 권태호씨(38·서울소공화원)는 『영부인도 모셨는데 이번에도 내가 모시게 됐다』면서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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