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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교수의 '망막 이야기'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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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 있는 유리처럼 맑은 물을 유리체(vitreous)라고 한다. 유리체는 위대한 바다이다. 그러나 위대한 바다도 나이를 먹는다. 어린 바다의 모습으로 이제는 돌이갈 수 없다.

최초의 바다는 엄마의 품속에 3주일 된 태아의 눈 속에서 시작되었다. 혈관들이 존재하던 붉은 바다이다. 그 다음 3주에 나타난 바다는 어른들 눈에서 볼 수 있는 하얀 바다이다. 땅(망막, retina)에서 만들어진 얇은 유리솜(콜라겐 섬유, collagen fiber)들이 바다를 하얗게 채웠다. 한동안 달(수정체, lens)을 떠받치는 나무(유리체 동맥, hyaloid artery)가 바다 중간에 자라나 있었다. 그러나 나무가 사라지자 달은 어떤 끈에 의해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 끈(모양체소대, zonule of Zinn)은 바로 세 번째 바다가 변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드디어 엄마로부터 독립한 아기 바다는 햇빛을 받으며 홀로 성장한다. 그 후로 20년 동안 바다 속 넙치(히알로싸이트, hyalocyte)는 열심히 히알루론산(hyaluronic acid)을 만들어 바다를 채웠다. 바다는 유리처럼 맑았다. 그 후로 다시 20년 동안 바다는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히알루론산은 바다의 99%를 차지하는 물을 모두 남김없이 머금은 채 얇은 유리솜들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다. 바다는 마치 맑고 투명한 젤리와 같다.

오랜 세월이 지나자 바다는 녹으며 변하기 시작했다. 눈 속에 꽉 차있던 바닷물 4mg은 40년이 지나자 1mg으로 녹아버렸다. 물로 녹은 곳에는 커다란 동굴들이 생겼다. 동굴 주변에는 유리솜들이 서로 뭉쳐서 여기저기에 굵은 줄들과 덩어리들이 생겼다. 빛이 들어올 때 실이나 날파리들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자 바다는 이제 더 이상 맑지도 투명하지도 않게 되었다. 바닷물이 녹기 시작한 것은 바다가 만들어진지 5년째부터라고 한다. 바다는 5년 동안만 젊어지다가 그 이후부터는 늙어간다는 뜻이다. 80년이 지나면 바다의 1/2이 녹아버린다. 바다는 왜 녹고 있는 것일까? 올빼미원숭이(owl monkey)의 유리체 바다에서 비밀이 풀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바다일수록 유리솜들이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올빼미원숭이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빛에 오래 노출된 바다 속에는 자외선에 의한 자유기(free radical)가 생긴다. 이것은 유리솜의 구조를 무너뜨려 유리솜과 히알루론산의 연결을 깨뜨린다. 여기에 높은 전기를 띈 물질들이 히알루론산 속에 있는 물을 잡아당기면 바다는 녹는다. 바다가 녹자 바다는 서서히 땅과 분리되기 시작된다.(후유리체박리 posterior vitreous detachment).

땅과 바다의 분리는 5세에서 15%, 65년 이상에서 40%이다. 바다가 땅과 분리가 되면 80%에서 눈앞에 날파리가 보인다. 날파리가 보이는 사람 10명 중 한 명은 2년 내에 반대편 눈에도 날파리가 나타난다. 날파리가 있어도 십중팔구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한둘은 바다의 유리솜들이 단단하게 붙어 있다가 떨어지면서 땅에 깊은 골을 파거나 흠집을 만들 수 있다(망막열공, retinal tear). 땅이 손상되는 순간 눈앞에서 불이 번쩍거리는 증상이 생긴다.

오래된 바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날파리와 번쩍거림은 땅(망막)을 꼭 한 번 둘러보라는 경고등이다.

☞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이성진 교수는 안과 전문의이다. 전공의 시절부터 겪었던 안과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눈’과 관련된 이야기로 다양한 칼럼 수백 편을 게재했다. 네이버 ‘황반변성을 극복하는 사람들’ 카페 상담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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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교수 기자 wismile@schmc.ac.kr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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