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다발네세」(584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5조8천4백30억원.
내년 예산액이다. 1조라면 동그라미가 자그마치 12개나 붙는다고 해도 실감이 나지는 않는다.
1천원권으로 58억장이 돼야 5조8천억원이 된다고 해도 실감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1천원짜리를 한 줄로 이어나가면 지구를 23바퀴 돌 수 있다. 위로 쌓아올린다면「에베레스트」산을 66개 올려놓는 것과 맞먹게 된다.
이렇게 말해도 사실은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너무나도 엄청난 숫자이기 때문이다.
전자계산기가 생긴 다음부터「키·펀처」병이란 새 직업병이 생겼다. 전자계산기는 인지·중지와 약지로 조작한다.
그런데 유독 약지에 염증이 생긴다. 까닭은 동그라미 숫자를 약지로 치는데 전체숫자의 45%나 되도록 영을 치는 빈도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구한말때의 얘기다. 철로 처음으로 만든 군남이 영강에서 진수하자마자 침몰하고 말았다. 다시 또 한 척을 만들려 했으나 쇠를 살 돈이 나라에 없었다.
그 때에 비기면 오늘의 규모는 꿈 같기만하다. 그러나 「키·펀치」를 두드리는 사람들에게도 실감은 전혀 나지 않을 것이다. 꼭 거액의 현금을 만지는 은행출납원같이.
지난 74년말 「노벨」상 수상기념 강연에서 「하이예크」박사는 「프리텐」스·오브·늘리지」(Pretence of Konwledge)란 말을 썼다.
알지도 못 하는 것을 알고 있듯이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결코 알 길이 없는 것을 제법 알 수 있다고 여기는 계획경제예찬자들을 빗대서 한 말이었다.
아무리 치밀하고 규모있게 가계를 짜놓아도 한달 후에는 수입과 지출이 뒤틀려 주부들이 애 먹는게 요즘 세태다.
그 규모라야 고작 2O만∼30만원이다. 그런 살림의 2억배나 되는 나라살림을 미리 짠다는 것은 보통 시민의 눈에는 신기에 가깝다.
그걸 심담하는 쪽은 더 놀랍다.
지난해에는 4조5천여억원의 예산에서 2백11억원을 깎았다. 어떻게 그 만큼만 줄이면 된다고 딱 떨어지게 계산해낼 수 있었을까. 특히 경탄할 만했다. 올해도 마찬가지 일게다.
그러나 서민들에겐 사실 5조가 얼마나 되며, 그 중에서 얼마가 깎일 것인지 등은 큰 관심사가 못 된다.
그저 공무부의 월급은 10%도 오르지 못하는데 어떻게 예산은 28.9%나 올릴 수 있는지.
상승율을 10∼12%로 잡은 물가가 요새처럼 그 이상으로 뛰면 어떻게 될 것인지가 궁금할 뿐이다.
특히나 1인당 18만원이나 내는 세금을 어떻게 감당해 낼 것인지가 큰 걱정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