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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2014 강릉 데카메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데카메론이 뭔가요? 메론 종류인가요?” 유머 사이트가 아니라 인터넷 질문 창에 뜬 글이다. 야유가 있음직한데 상세한 답변이 나와 있다. 흐뭇하다. 난 이럴 때 고맙다.

 짧은 기행문의 제목을 ‘2014 강릉 데카메론’이라고 정한 배경은 의외로 단순하다. 10명이 모여서 진실게임을 했다. 10일 동안 이어진 건 아니다. 그냥 각자 살아온 이야기를 밤새 퍼부었다. 피렌체 교외의 별장 대신 강릉 선교장이었다. 달빛은 적막하고 그윽했다.

 부제를 정한다면 ‘그때는 왜 몰랐을까’로 하고 싶다. 교실에서 데카메론의 주제를 사랑과 지혜라고 배웠다. 살아보니 사랑이 많을 땐 지혜가 부족했다. 지혜가 반짝일 땐 사랑이 바짝 시들어 있었다. 사랑과 지혜가 공존했던 시간은 퍽 짧았다.

 10명은 입학동기들이다. 학과정원이 35명이었으니 30퍼센트가 모인 거다.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여행의 시작 부근에는 슬픈 사연 하나가 웅크리고 있다. 지난 3월 초 대학동기 용찬이랑 점심을 먹었다. ‘인자무적’이 그의 별호다. 조심스레 청첩장을 내밀며 주례를 의뢰했다. 즐거운 청탁이다. 그의 아들 두연이를 예전에 진로상담해준 적이 있다. 혼인 날짜는 5월 25일. 그런데 운명이 뒤틀렸다. 5월 16일에 용찬이가 설악산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다. 헬기까지 떴지만 골든타임을 놓쳤다. 아홉시 뉴스에까지 이 소식이 나왔다.

 결혼식은 일정대로 진행됐다. 주례사는 무거웠다. 신랑·신부 표정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하객들 표정도 허망했다. 피로연에서 동기들에게 제안했다. “다음에 만나자는 말은 하지 말자. 다음 결혼식, 다음 장례식에서 만나자는 거 아닌가. 입학 40주년을 맞아서 우리 여행 한번 가는 건 어떨까?”

 기획이 ‘감동적’이어서 캐스팅도 순조로웠다. 장소는 국문학과 출신들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선정했다. 김시습과 허균, 허난설헌 남매, 신사임당과 율곡 모자. 당대의 문사들을 키운 강릉 아닌가.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일이다.” 데카메론 서문이다. 학교 다닐 때 늘 인상 쓰던 친구가 있었다. 언제나 표정이 흐려 있었다. 그때는 그 응어리가 불편했다. 깊은 밤 친구의 고백을 들었다. 정말로 ‘인상 쓸 만한 나날들’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과 화해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몰랐다. 이제는 어렴풋이 알겠다. 감사가 몰려온다. 살아있으니 얘기도 듣는구나. 살아있으니 얘기도 할 수 있구나. 그런데 얘들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주철환 아주대 교수 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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