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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라는 악마의 유혹에 끌려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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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철피아’(철도 마피아) 납품 비리로 수사선상에 오른 김광재(58) 전 한국철도시설공단 이사장이 한강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서울 광진경찰서에 따르면 김 전 이사장은 4일 오전 3시30분쯤 서울 광진구 자양동 잠실대교 전망대에서 한강으로 뛰어내렸다. 김 전 이사장은 전망대에 양복 상의와 구두·휴대전화·지갑 등의 개인 소지품을 남겼다. 목격자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수색 2시간 만인 오전 5시45분쯤 잠실대교 교각 인근 수중에서 김 전 이사장의 시신을 발견했다. 김 전 이사장은 지난 3일 오후 1시쯤 친구를 만난다며 외출한 뒤 집에 귀가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들에 따르면 김 전 이사장은 최근 검찰의 자택 압수수색 이후 괴로움을 토로해왔다고 한다.

 특히 대학 후배인 권영모(55) 전 새누리당 수석부대변인이 검찰에서 “AVT사의 부탁으로 김 전 이사장에게 수천만원을 전달했다”고 진술하자 큰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유상범 서울중앙지검 3차장은 “김 전 이사장이 수사로 인한 중압감이 컸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개인 소지품과 함께 발견된 유서는 A4용지 4분의 1 크기의 쪽지 3장 분량이다. “정치로의 달콤한 악마의 유혹에 끌려 잘못된 길로 가게 됐다”고 자책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철도업계 관계자는 “평소 정계 진출을 원했던 김 전 이사장이 정치권 유력 인사들로부터 특정 업체를 도와달라는 압력을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말했다. 유서 말미에는 “미안하다. 그간 도와주신 분들에게 은혜도 못 갚았다. 나로 인해 상처받은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미안함을 표현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AVT사가 호남고속철도를 비롯한 각종 철도 공사에 레일체결장치 납품업체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김 전 이사장을 비롯한 공단 임원들이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수사해왔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어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리게 됐다. 나머지 비리 관련자에 대한 수사는 계속 진행한다. 검찰은 이날 김 전 이사장에게 돈을 전달한 혐의(변호사법 위반 등)로 권 전 부대변인을 체포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권 전 부대변인이 AVT사 이모 대표의 부탁으로 또 다른 정·관계 인사에게 로비를 벌인 단서를 확보해 수사 중인 만큼 신속한 신병 확보가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숨진 김 전 이사장은 행정고시 24회로 국토해양부 물류정책관·항공정책실장 등을 거쳐 2011년 8월 공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취임 이후 노조와 갈등을 빚어오다 올해 1월 임기를 7개월 남겨두고 사임했다. ‘철피아’ 수사 과정에서 관련자가 목숨을 끊은 건 김 전 이사장이 두 번째다. 지난달 17일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공단 수도권본부 이모(51) 부장이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

심새롬·고석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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