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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일기장 있어야 연명의료 중단 … 뒤로 가는 존엄사 절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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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연명의료 중단(일명 존엄사)을 결정하는 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방안이 추진돼 논란이 일고 있다.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의 분명한 뜻을 알 수 있으면 문제가 안 된다. 환자가 원하면 계속하고 그렇지 않으면 중단하면 된다. 그걸 모를 경우가 문제다. 이 경우 환자 생각을 추정해야 하는데 정부가 그 절차를 엄격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 오진희 생명윤리정책과장은 3일 “환자의 평소 의사(뜻)를 추정할 때 가족의 진술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일기·육성녹음·유언 등 객관적 자료가 있어야 연명의료 중단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달 중 존엄사 법안을 만들어 다음달 공청회를 열 방침이다.

 이 문제는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부터 17년간 논란이 계속됐다. 아내의 요청에 따라 의사가 50대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가 살인방조죄로 처벌받았다. 2009년 5월 ‘세브란스 김 할머니’에 대한 대법원의 존엄사 허용 판결 이후 급물살을 탔다. 지난해 7월 학계·법조계·종교계 등 전문가로 구성된 국생위가 우여곡절 끝에 시행 방안에 합의했다.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을 법제화하고 의사를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환자가 연명의료 중단 뜻을 담아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두면 그대로 하면 된다. 그게 없으면 가족 두 명이 환자의 평소 생각을 진술하고 의사가 임종 환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경우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이번에 복지부가 일기 등이 있어야만 연명의료 중단이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입장을 밝히면서 다시 논란이 됐다. 오 과장은 “가족 두 명이 짜고 환자의 뜻에 반하는 결정을 하거나, 다른 가족이 나타나 이의를 제기하면 문제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절차를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서울아산병원 고윤석 교수(호흡기내과)는 “가족이 짜고 임종(臨終) 단계에 들지 않은 환자의 연명의료 중단을 요구한다고 해서 어느 의사가 그걸 받아들이겠느냐”며 “이번 방침은 연명의료 중단을 하지 말라는 말과 마찬가지여서 환자와 가족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 교수는 “일기 등을 요구하면 의사와 가족 간에 갈등과 불신이 커지고 연명의료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증가할 게 뻔하다”고 지적한다.

  정부 방안은 일기쓰기와 육성녹음이 흔치 않은 요즘 현실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종양내과)는 “지금도 환자의 뜻을 모를 때는 의사가 가족의 뜻을 존중해 연명의료를 하지 않거나 중단하고 있다”며 “연명의료 중단 결정은 급박한 상황에서 발생하는데 일기 등의 자료를 요구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국생위 권고안은 97년 이후 16년 논의한 성과물이다. 이를 바꾸면 어렵게 만든 사회적 합의가 무의미해진다. 또 대법원의 김 할머니 존엄사 허용 판결 취지에 맞지 않다. 대법원은 “환자가 회생가능성이 없는 회복 불가능한 사망과정에 진입한 경우, 환자의 진지하고 합리적인 치료중단 의사가 추정될 수 있다면 진료행위를 중단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미국·일본·유럽 등 선진국은 환자의 의사를 알 수 없을 경우 가족의 대리결정권을 인정한다. 일기를 자료로 내도록 의무화한 나라는 없다.

  정부는 가톨릭계 등의 반대 의견을 무시했다가 자칫 국회 논의 과정에서 법률 제정 자체가 무산될 것을 우려한다. 박형욱 단국대 의대 교수는 “국회 논의 과정에서 종교계 등의 반대가 많아지면 그 동안의 입법 노력 자체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서울아산병원 고 교수는 “이번 방침이 법안에 담긴다면 차라리 법을 만들지 않는게 낫다”고 말했다.

신성식 선임기자

◆연명의료=임종(臨終) 과정에 접어든 환자에게 인공호흡기·심폐소생술·혈액투석 등 무의미한 의료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생명 연장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을 늘리는 행위로 비판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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