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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5) 제64화 명동성당(55) 노기남 성직은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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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62년부터 4년 간 매년3∼4개월씩「로마」에서 제2회「바티칸」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란 특수한 경우에 처해 신앙·도덕·교회규율 등 종교문제를 결정짓기 위해 교황이 전 세계의 추기경과 대주교 및 주교 등 고위성직자 전원을 소집하는 종교회의를 말하는 것으로 1869년 그 첫 번째의 공의회가「바티칸」에서 개최되었었는데 근 1백년만인 1962년에 같은 장소에서 두 번째로 회의가 열려 이것을『제2「바티칸」공의회』라 일컫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제2「바티칸」공의회에 매년 참석을 했었는데 l965년 말 이 회의가 종료되고 난 뒤 1966년 2월 귀국해서「주디체」당시 주한교황대사를 통해 교황청에 사의를 표명했었다.
내가 교구장을 사퇴하려고 한데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없을 수 없다.
당시「바티칸」공의회에서 논의된 것 중에는 노년에 접어든 성직자의 은퇴문제가 있었다. 일부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주교들은 사제의 70세 정년제를 채택하여 보수성향이 강한「가톨릭」의 세대교체를 촉진하고 교회 밖 세상의 급진적인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히 내세웠다. 이러한 주장이 관철된 것은 아니나 화의에 참가한 노년주교들로서는 심각하게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때 나는 70살이 안되었고 나 자신 늙었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지만 4년 동안 공의회에 참석하면서 절감한 것은 급변하는 시대조류에 대응하여 공의회에서 결정한 중요사안을 수행해 내기에는 힘에 벅차다는 것이 솔직한 내 심경이었다. 또 젊고 의욕 있는 후배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내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컸었다.
그러나 당장 사퇴를 결행하기에는 교구 안에 몇 가지 난 문제가 있었다. 6·25뒤 교회의 북구를 위해 과욕 하게 일을 벌인 것과 성모병원 신축의 재정계획이 차질 난 것 등에 기인, 그때 교구의 재정은 심한 어려움 속에 있었던 것이다.
성모병원은 원래 서독「미세레오르」(「가톨릭」해외원조기구)의 원조약속을 받고 착공을 했다. 1958년「쾰른」대교구「프링스」추기경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20만「달러」의 지원약속을 받아 병원신축을 시작하게 된 것인데 그 돈이 우리 손에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였다. 물론 병원신축을 전적으로 서독의 지원에만 의존했던 것은 아니나 근 1백만「달러」의 총 공사비 중 서독의 것은 큰 몫이었기 때문에 그 돈이 늦게 들어옴으로써 교구재정이 큰 부담을 안게 된 것은 사실이다.
당장의 공사자금이 급해서 여기저기서 빚을 얻어다 썼기 때문에 2년 후에 들어온 서독의 20만「달러」는 그 동안의 이자를 갚기에도 모자랄 형편이었다.
거기에다 경향신문의 누적된 적자와 교회운영 및 각급 학교의 시설확충 등이 겹쳐 재정사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이와 같은 어려움의 뒷수습을 후배에게 떠맡길 수가 없어 결단을 못 내리고 1년을 끌었는데 1967년 1월에는 드디어 6천여만 원의 부도가 발생, 일이 더 다급해졌다. 이 때문에 사채권자들이 주교관에까지 몰려오니 송구스럽고 민망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당장 결제를 기다리고 있는 수표가 또 7천만 원이나 되어서 시급히 메워야할 돈이 최소한 1억3천여만 원은 있어야 했다.
나는 중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2월 중순 나는 교황대사를 찾아 1차 이 문제를 협의했다. 나는 나의 중대결심을 피력하고 10여일 후인 2월말께 사표를 제출했다. 서울교구장으로 내가 눌러앉아 있는 것이 사태수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달 뒤인 3월24일 교황청은 내 사표를 수리한다고 통보해왔다. 그러나 이때는 교회가 1년 중 가장 바쁜 부활절을 앞두고 있던 때라 나는 교황대사 및 나의 후임자인 수원교구장 윤공희 주교 등과 의논, 나의 은퇴사실을 당분간 공표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부활절행사를 치르는 틈틈이 은퇴「메시지」를 타자했다. 각 성당 신부들에게 보내는 것, 신자들에게 보내는 것, 그리고 국민에게 보내는 것 등 3가지를 작성, 이를 은밀히「프린트」하도록 일러놓고 부활절이 끝나면 며칠 간 휴양을 떠난다는 핑계로 옷가지를 챙기게 했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마쳤으나 막상 은퇴할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내가 신학생이던 시절 손「부이스」신부를 찾아 방학을 보냈던 하우현 성당이나 안성의「미리내」성당을 생각했으나 나는 안양의 성「나자로」마을로 가기로 작정했다.
1967년3월27일 상오 나는「메시지」를 각 성당으로 발송하고 각 신문사에도 간단한 은퇴성명서를 보냈다. 오후2시에는 윤 주교를 맞아 주교관에서 사무인계인수를 끝내고 그 길로 성「나자로」마을을 향해 떠났다.
수원 가까운 성「나자로」마을을 향하는 내「지프」뒤에는 각 신문·방송국의 취재차량이 줄을 이었다. 이 행렬을 돌아보며 나는「정치주교」의 은퇴답다고 고소를 했다.
이로써 나는 사제로서 37년 간, 주교로서 25년 간 몸담았던 명동성당을 떠나게 된 것이다. 어려움을 물려주고 떠나는 것이 못내 미안하고 아쉬웠지만 나는 천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빌면서 명동성당을 떠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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