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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강성현] 장제스 군대와 우리 군대를 되돌아보는 심정

중앙일보

입력

로이드 E. 이스트만(Lloyd E. Eastman, 1929~1993)은,《파멸의 씨앗 ; 전쟁과 혁명 속의 국민당 지배 중국, 1937~1949(Seeds of Destruction ; Nationalist China in War and Revolution, 1937~1949)》에서, 장제스 정권의 패인을 세밀하게 분석하였다. 이 책은 민두기 (1932~2000) 교수가 1986년에,《장제스는 왜 패하였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이 책의 제 6장, <항일전쟁과 국민정부군 *약칭 국부군>과 제 7장, <국부군과 공산군의 싸움>에서는 탕언보(?恩伯, 1900~1954), 후중난(胡宗南(1896~1962) 등 패장들의 회고담을 근거로, 장제스 군대의 패인을 상세히 지적하였다. 300 개 사단을 상회하는 압도적인 병력 과 장비에다 미군의 지원까지 받은 장제스 군대는 도대체 어떻게 무너졌는가.

항일전 수행 당시, 장제스의 국부군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됐는데, 서로 불신하고 반목하였다. 중앙군의 비율은 30만(20%) 정도로 추산된다. 중앙군은 황포군관 출신이 지휘하는 부대와 독일인 군사고문이 지도하는 총통 직속의 정예부대로 이뤄졌다. 이 부대의 병력은 8만여 명에 달하며, 자동화기와 박격포로 중무장하였다. 장제스는 중앙군을 우대하고 지방군을 홀대함으로써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황포 군관학교 교육 과정은 반년에 불과하여 황포 군관 출신 지휘관이 이끄는 부대는 많은 취약점을 드러냈다. 게다가 장제스 자신도 황포 출신과 동향 인물을 감쌌다. 육군에서 가장 유능한 장군으로 평가되는 광서계(廣西系) 바이충시(白崇禧, 1893~1966) 장군을 요직에서 배제하였다.

윈난의 룽윈(龍雲, 1884~1962)이나 산시(山西)의 옌시산(??山, 1883~1960)은 독자적으로 자신의 군대를 운용하였고, 중앙군의 장악 하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투에 투입 시, 장제스가 중앙군을 보호하기 위해 지방군을 희생시키려 한다고 믿었다. 애초부터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기대하기 힘든 구조였다.

국부군은 손실된 병력을 보충하는 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른바 ‘유전 면제, 무전 징집’으로 민심이 이반됐다. 돈을 받고 대리로 입대하고 도망치는 ‘직업적인 건달’도 생겨났다. 비위생적이고 급식 여건이 열악한 징집소는 거지 합숙소와 다를 바 없었다. 징병처장, 징병수집소 총국장 등을 즉결처분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징집된 병사는 대부분 행군 도중 죽거나 도망쳤다. 장제스의 증언을 들어보자.

“푸젠성(福建省)에서 구이저우성(?州省)에 이르는 행군 도중에 1000 명중 100 명 미만의 신병이 살아남았다. 광둥에서 윈남까지의 500 마일 행군에서 700 명 중 17명이 살아남았다(위의 책, <항일전쟁과 국민정부군>, 177쪽, 재인용).”

매독? 임질에 걸린 병사, 영양실조에 걸린 병사들로 인해 전투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허기에 지친 병사들이 비적 떼처럼 민가에 몰려가, 식량이나 물자를 약탈하여 인민의 기대를 저버렸다. 1945년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오합지졸 군대, 국부군은 참화를 면할 수 있었다.

다음 해 국공내전이 개시될 무렵, 국민당 군대는 8년에 걸친 항일전으로 말미암아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특히, 지휘관의 무사안일, 부정부패, 병사들의 사기 저하로 전투력을 갉아 먹었다. 그러나 공산군은 이 시기에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때부터 이미 장제스 군대에 파멸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소련의 만주 진공, 인민의 지지를 등에 업은 공산군은 파죽지세로 전역을 장악하였다.

국부군은 전쟁의 와중에도 파벌 싸움, 반목과 질시, 배반과 투항이 이어졌다. 이와 더불어 공산군의 첩보 공작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주요 패인과 사례를 소개한다.

? 파쟁과 반목

“1948년의 유명한 회해전투에서 치우칭촨(邱淸泉) 장군은 공산군에게 포위된 황바이타오(黃百韜) 부대를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치우칭촨 부대는 10일 동안 겨우 8마일을 나아갔을 뿐이다. 황 장군이 자살하고 부대가 공산군에게 투항하였을 당시, 아직도 황바이타오 부대로부터 12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다. 장제스의 총애를 받은 황 장군을, 치우칭촨은 몹시 시기했다고 한다(위의 책, <국부군과 공산군의 싸움>, 194쪽, 재인용).”

? 국부군의 배반 및 투항

1945년 10월 말, 허베이 성에서 까오수쉰(高樹勛) 장군의 부대가 투항한 것을 필두로 반기를 든 부대가 속출하였다. 공산군 측은, 1946년 7월부터 1949년 1월까지 370만 명의 포로를 획득했다고 주장한다. 공산군은 선전전술의 일환으로 포로를 친절히 대하였다. 유용한 자원은 전선에 재배치하였으며, 허약한 자나 쓸모없는 자들은 통행증과 여비를 줘 돌려보냈다. 이러한 ‘포로대우 전술’로 인해 국부군의 투항이 더욱 용이해졌다.

? 공산군의 첩보 공작

1948년 산둥성 웨이현(?縣)의 전투 때, 국부군 제 96군 참모장은 공산군이 심어 놓은 첩자였다. 1948년 9월 지난(濟南) 전투 때 제2평정사령부의 책임자는 국부군의 작전계획 전부를 적에게 알려줬다. 류페이(劉斐), 다이룽광(戴戎光)의 예는 더욱 충격적이다.

“국부군 총참모부 차장(군령부 차장)인 류페이 장군은 공산군의 첩자였다. 그는 주요 정보를 공산군에게 보고하였다. 아울러, 또 다른 공산군 첩자인 궈루구이(郭汝?)를 작전계획처장에 앉혔다. …1949년 봄, 류페이는 국민정부 평화협상대표단의 일원으로 공산당 협상단과 마주 앉았다. 공산당 측의 수석 협상대표는 상대방의 모든 고려나 책략을 다 알고 있는 기막힌 입장에 있게 된 것이다. …1949년에 마오쩌둥은 그를 공개적으로 ‘인민 공화국의 건립에 공헌한 훌륭한 시민’이라며 지하활동 공적을 치하하였다.

… 황포군관 출신이자 장제스의 심복, 다이룽광도 공산군의 회유에 넘어갔다. 그는 상하이와 난징의 중간에 있는 장인(江陰)의 요새에 배치된 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총부리를 다른 국부군 수비대에 돌리도록 명령하였다. 다이룽광이 배신한 덕에 공산군은 강을 건너 국민정부의 수도인 난징에 입성하였다. 이리하여 국민정부의 지배는 끝장이 난 것이다(위의 글, 196~197쪽 요약).”

? 국부군의 경직된 지휘체계

공산군은 지휘관에게 광범위한 재량권을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상황에 대처하는 임기응변 능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국부군의 지휘체계는 경직돼 돌발적인 순간에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밖에, 공산군은 전공(戰功)에 따라 신상필벌을 하였다. 그러나 국부군은 출신성분과 재력, 정치적 배경을 우선 고려하였고 전공은 그 다음 문제였다. 또한 간단한 문제하나를 놓고도 회의를 일삼았다.

“만주의 전투에서 공산군은 썰매나 말을 타고 이동하였다. 그러나 국부군은 수많은 회의 끝에야 겨우 이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위의 글, 199쪽).”

흔히, 부패하고 무능한 군대를 ‘당나라 군대’, 또는 ‘장개석 군대’로 표현한다. 우리 군대에서 한 때 이런 얘기가 나돌았다. “장개석 군대는 회의 때문에 망했다.” 알맹이 없이 길게 이어지는 지루한 회의에, 이골이 난 군 간부들이 투덜대며 뱉은 말이다. 혹시 우리 군대가 지금 이 시간에도, ‘장개석 군대’처럼 쓸데없는 회의에 에너지를 소모하지나 않는지 모르겠다.

지난 4월 하순, 우연히 길을 가다가 소대장 시절, 옛 대대장을 만났다. 그는 4년의 생도 생활을 마쳤고, 월남전에도 참전하여 무공훈장을 받았다. 70의 나이에도 여전히 젊은 시절의 패기가 넘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가 다투듯 그 시절 군대 얘기를 끄집어냈다. 그는 베트남 전 참전 얘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그러다 우리 군대의 앞날이 염려스러운지 장탄식을 한다.

“지금 군인들 중에 전투를 치러본 군인은 단 한 사람도 없어. 수 십 년 동안 브리핑 잘하고, 보고서 잘 만드는 ‘착한 군인’이 출세하는 ‘행정 군대’가 되고 말았어. 참 걱정이야!”

‘노크 귀순’에 이어,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임 병장 총기 난사사건’으로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들이 잠 못 이룬다. 조석으로 변하는 불완전하고 충동적인 젊은 병사들을 A,B,C 등급으로 분류하고, 관리해서는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용장 밑에 약졸 없고,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하였다.

‘콩가루 군대’의 지휘관, 다이룽광은 아군에게 총부리를 돌렸고, 임병장은 내무반 전우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거대한 호수 제방도 개미구멍 하나로 붕괴된다. 우리 군대에 ‘콩가루 군대’의 조짐이 보인다.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하루 속히 전면적인 개조에 나서기를 촉구한다.

전 웨이난(渭南)사범대학 교수 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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