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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창립 20돌 맞은 '소시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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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소비자 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www.cacpk.org)이 11일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국내의 대표적 소비자 단체로 성장하기까지 20년의 시간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소비자 권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던 1980년대엔 국내 정부와 대기업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해야했다. 90년대엔 세계화의 바람이 불면서 다국적 기업에 이어 외국 정부가 ‘링’위로 올라왔다. 오늘날
‘소비자는 왕’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되기까지 지난 20년은 고군분투(孤軍奮鬪)의 세월이었다. 그 뒷얘기를 들어봤다.

◇'○○모'이름의 원조, 모유 권장 사업으로 시작

'소비자 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이하 소시모).

15자에 이르는 단체 이름은 83년 창립 당시는 물론 지금의 상황으로 볼 때도 특이한 것이다.

당시 경제기획원에 소비자 단체로 등록을 할 때 정부 쪽에서 '이름이 너무 길고 생소하다'며 다른 이름으로 바꿀 것을 권유할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단체 이름으로 인기를 얻는 '~ 시민의 모임'(~ 시모),'~ 사람들의 모임'(~ 사모) 등의 원조였던 셈이다.

소시모의 첫 사업은 모유 권장 운동, 즉 '분유 소비 반대 운동'이었다.

"한국은 왜 그래요? 미국 눈치를 너무 보는 것 아니오?"

정식 출범 직전 필리핀에서 활동 중이던 송보경(57.여) 소시모 이사는 당시 국제소비자기구 아시아태평양 지역사무소 사무총장이던 안와 파잘에게 이런 항의를 들었다.

1981년 세계보건기구 총회에서 분유 등의 광고를 규제하는 합의안을 투표로 통과시켰는데 당시 한국이 기권한 데 대한 문제 제기였다. 회원국 중 1백18개국이 찬성하고, 미국이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이에 자극받은 송 이사는 즉시 한국의 소시모에 모유 권장 운동을 첫 사업으로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 꾸준히 지속된 소시모의 운동은 결국 91년 국내에서 분유 광고를 금지하는 성과를 낳았다.

◇'객관성이 생명이다. 증거를 잡아라'

단체 이름에 '연구'를 집어넣은 소시모는 '증거주의'와 '전문성'을 강조한다고 한다. '심증만으로는 안되며 반드시 물증을 찾아야 일을 벌인다'는 게 소시모의 원칙이다.

96년 '해태 나비스코 사건'때도 이런 증거주의는 빛을 발했다.

해태제과는 당시 미국 나비스코사(社)로부터 과자를 수입해 국내에 판매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과자들이 국내에 판매되는 현실을 소시모가 고발한 것이었다.

당시 나비스코 과자 봉투에는 이상한 숫자가 인쇄돼 있었다. 숫자는 미국 내에서 허용되는 유통 기한이었다. 국내에서는 별도의 유통 기한이 적힌 스티커가 붙어 판매됐다. 실제 유통기한보다 6개월 늘린 것이었다. 해태 측은 이 숫자가 유통기한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재옥(56.여) 소시모 회장(당시 사무총장)은 96년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동포 변호사, 미국 소비자단체 인사와 나비스코 본사를 방문했다.

그는 당시 나비스코 부사장에게서 '일련의 숫자가 유통기한'이라는 인정을 받아내 녹음기에 담았고 나비스코의 무책임함을 한국 사회에 폭로했다. 이후 해태 측은 제품을 전량 수거했고, 나비스코 본사와 해태 측의 사과 광고가 일간지에 실렸다.

"소시모에서는 절대 단독으로 업체 관계자를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어요. 변호사, 미국인 단체 활동가와 함께 간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소비자 단체는 투명성을 의심받아서는 안되며 객관적으로 확보한 증거를 앞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죠."(김재옥 회장)

◇기업.정부'골리앗'들과의 힘겨운 싸움

20년간 소시모는 기업의 직간접적인 압력, 정부의 비협조에 시달려야 했다. 소비자 운동 단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큰 '벽'이었다.

창립 초기에 소시모의 상근 활동가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이들은 제보를 받아 기업의 소비자 상담실에 전화를 할 때마다 벽을 실감했다. "여자가 집에서 살림이나 하지. 왜 이상한 전화를 하고 그러느냐"며 아예 통화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86년의 '화학조미료 덜 먹기' 운동을 소시모 활동가들은 '백구두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화학조미료 남용의 위험성을 알리는 세미나에 조미료 업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남성들이 나타났다.

그 중 한명이 세미나 단상 위에 뛰어 올라가 "화학조미료가 어떻길래 난리들이냐"며 횡포를 부렸다. 그 남성이 '백구두'를 신고 있었다(이후 그 남성은 1년 뒤 소시모에 찾아와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했다고 한다).

이때 소시모 활동가들은 권력 기관으로부터 단체 참여 인사 및 활동 상황 전반에 대해 내사를 받기도 했다. 기업측이 '수출 활동을 방해한다'며 권력 핵심부에 진정을 넣은 탓이라는 게 소시모의 추측이다.

정부 역시 소시모 활동에 대해 비협조적이거나 아예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행태를 보였었다.

86년 소시모가 유엔에서 발간한 '사용이 금지 또는 규제되는 의약품 원료 리스트'를 근거로 국내에서 위험 화학물질이 별 규제 없이 이용되는 현실을 고발하던 때다.

관련 세미나를 준비해 담당 부처에 '세미나를 하자'고 제안하자 고위 간부가 "실무자는'유엔에서 그런 책을 만들지 않는다'고 하는데, 무슨 황당한 얘기냐"고 했다고 한다. 소시모 측은 "지금 당장 사무실로 오라. 책을 보여주겠다"고 받아칠 수밖에 없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86년) 이후 방사능 낙진에 오염된 농산물이 한국에 유통되던 당시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먼저 유럽의 시민단체들로부터 '체르노빌 인근의 농산물이 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됐다. 그래서 88년 정부 관련 기관에 해당 지역에서 수입된 농산물의 방사능 오염 검사를 의뢰했다.

기관들은 '그런 검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며 검사 자체를 거부했다. 이듬해 당시 평민당 국회의원의 도움을 받아 방사능 오염 식품에 대한 국내의 검사 자료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난 지 3년이 지난 뒤였다.

◇소비의 안전성 확보, 결국 '환경보호'

91년 소시모는 '국산 새우젓 일부에서 비닐 조각이 검출된다'는 주의보를 내렸다. 그 직후에 해당 지역 수협조합장이 소시모를 찾아왔다. 그는 "고의가 아니다. 너무 억울하다. 내년 새우잡이철에 함께 바다로 나가보자"고 통사정을 했다.

다음해 소시모 활동가들은 어부들과 함께 몇시간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끌어올린 그물 속에는 살아 있는 새우와 잘게 잘린 비닐 조각이 함께 들어 있었다. 바다 자체가 이미 쓰레기로 오염돼 있던 것이었다.

소비자 운동을 위해서는 관련 학자들의 협조가 절대적이지만, 어려움은 늘 있었다. 학자들 대부분이 어떻게든 국내 시장 상황과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노태우 정권 당시 '팔당호 골재 채취 때 발생하는 찌꺼기가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지적이 나왔을 때였다. '환경 오염'을 줄기차게 주장해 소시모로부터 1백50만원 규모의 조사를 의뢰받은 인사가 있었다.

"조사 뒤에 그 사람은 별로 환경오염위험이 없다고 모호한 입장을 취하더군요. 알고 보니 그 뒤 관련 기업으로부터 큰 금액의 프로젝트를 맡았던 것 같아요."

한 관계자의 회고다.

소시모 활동가들은 "불과 몇년 전의 일들인 데도 돌이켜보면 '도대체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소비자 운동이 넘어야 할 벽은 높다"고 이들은 입을 모은다.

"과학 기술이 변화하면서 전자상거래.유전자 조작 식품 등 이전에는 개념조차 없던 소비 분야가 계속 생겨나고 있어요. 세계화 추세에서 정부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기업의 힘은 계속 커지게 될 거고요. 새로운 쟁점을 발굴할 능력이 떨어지면 소비자 단체도 위기를 맞게 됩니다. 아직도 소시모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아요"(김재옥 회장)

'20년간 한번도 창립 행사를 가져보지 못했다'는 소시모는 11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창립 기념 행사를 연다. '고군분투' 20년 만의 첫 잔치다.

성시윤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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