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다산연구에 「사각」이 많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다산」 연구에는 아직도 맹점과 사각이 수두룩이 남아 있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말기의 대학자요, 그에 관한 연구 또한 번다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산」을 논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연구엔 너무도 여백이 많다.
민영규 교수(연세대)가 18일 하오 연세대 국학 연구원 주최 월례 발표회에서 발표한 「다산삼칙」은 바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다산 연구의 새 요처이며 맹점을 밝힘으로써 학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민 교수는 첫째로 다산의 전 저작을 수록한 『여유당전서』에는 그의 작품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작품 『우세화시집』이 포함돼있음을 지적했다.
『여유당전서』는 1936년 신조선사가 정인보·안재홍의 교열을 받아 활자본으로 간행한 1백54권 67책의 다산 저작집이다.
그런데 이 책에 26「페이지」에 걸쳐 수록된 『우세화시집』은 실상 다산의 시문이 아니고 그의 친우 대연 이면백의 것이라는 얘기다.
원래 『우세화시집』은 명나라 시인 운도 육원중의 시집이며 그 운을 따 외심 윤영희가 시를 짓고 여기에 대연 이면백이 제를 붙였다.
민 교수는 다산과 윤영희·이면백은 절친한 사이로 이들이 서로 자신의 저작을 빌려주고 빌어 받는 사이에 대연의 저작 『우세화집』이 다산의 저작 속에 끼어 들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둘째로 민 교수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으나 다산이 47세 때 중풍으로 왼팔을 쓰지 못하게 됐으며, 이로부터 그의 모든 저작은 종전과는 다른 경향을 띠게 됐다고 분석했다.
다산은 47세 되던 여름에 스스로 『좌견 마비로 드디어 「폐인」이 되었다』고 기록됐다.
자신의 병 때문에 그는 무서운 실의를 맛보게 되었으며 그것은 마침내 백성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한 통한으로 옮겨갔다.
다산은 이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친교서절」을 말하게 되고 외로움을 호소하게 된다.
뿐더러 그는 전에 없이 흉년을 만나 자식을 버리는 전라도 유민의 참상을 뼈아프게 슬퍼하고 있으며 정신 생활 면의 일대전기를 맞는다.
다산이 흑산도에 유배된 중씨에게 보낸 편지에 『이 병이 아니었던들 나는 주위주를 완성했을 것』이라고 했듯이 좌수부체의 이병이 아니었으면 그는 그저 경서들의 주나 달면서 세월을 보냈을지 모른다.
『목민심서』 다 『흠흠신서』다 『경세유표』다 하는 사회개혁의 의지가 충만한 그의 대표적 저술도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민 교수는 『이 나라의 구석구석 일모일발이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고 과격한 표현을 한 것도 그 의식변화의 결과라는 분석이다·
이런 의식구조의 변화로 다산은 두보나 백락천에 비견되는 「사회성시」를 내뱉게 된다.
그는 「폐인」이 되고 3년 만인 50세 때 용산리·파지리·순남리 등을 남겼는데 이것은 어떤 두보의 시보다도 과격하고 격렬한 내용이다.
세 째로 다산은 58세에 고향 마제로 돌아와 18년간의 만년을 보내면서 강화학파의 인물들과 교유하고 남인의 학문영역에서 떨쳐나 새로운 세계에 접하게 됐으며 이로써 『마제·사촌 지역은 강화학파의 제1의 식민지가 됐다』고 민 교수는 말했다.
여기서 다산은 자신의 패가를 처음으로 알아준 우천 신작을 만났으며 이충익·이면백· 이시원 일가와 여동직 등을 만나게 되고 경세치용면의 「참 다산」을 형성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볼 때 일찌기 위당 정인보가 『선생 1인에 대한 고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의 명반 내지 전조서 성쇠흥망에 대한 연구』라고 까지 말한 「다산」 연구가 아직도 수두룩한 여백을 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공종원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